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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당> 프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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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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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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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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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136
현대인에게 종교란 어떤 의미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아니면 중세의 신본주의?
분명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중세의 권위적인 종교중심사회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민중이 주인되는
근대로,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나 결코 사상의 발전과 현실의 모습
은 일치되지 않는다. 아직도 종교는 권위적이며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결코 중세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안토니아 버드는 <프리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용기 있는 조명하고 있다. <프리스트>는 표면적으로 신부의 동성애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그 외의 주변인물들을 통해 이 사회에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그러나 한결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 그렉신부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음악 하나를
소개한다. 그 음악의 내용은 사랑이 기본이 된 인간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람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거기엔 이미 사랑이 배제된 차가운 현실만이
남아있다. 이미 신은 인간의 제도에 대해 포기한 상태이고 방치된
제도는 인간의 힘의 논리에 의해 -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 지배되고
있다. 그 지배논리에 도전하는 메튜의 사회의식, 비록 개인적이지만
성에 대한 자유를 원하는 그렉.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편견의 그늘에 가려진 참된 자유를 향한 감독
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인 안토니아 버드의 첫 작품
<프리스트>는 용기 있는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 목청이 너무 작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네러티브구조는 따뜻한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하고 그래서 자칫 감상적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신부의 동성애가 주 테마인 것처럼 소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감독인 안토니아 버드는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했고
고민했다.
영화를 본 후 혼돈스러워 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고민의 몫이 아닐까?
최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영화의 많은 부분에 동성애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다루어진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의
사조가 차츰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동성애 문제로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아직도 페미니즘조차 불모지나 다름없으니...
물론 다른 나라 영화들이 이미 페미니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 나름으로 깊이 있는 고민과 창작에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노력했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자신의 아픔에 직접 접근하고 그것을 도려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겐 너무도 절실하지 않은가?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국영화업계에서 주목받는(?) 시장인 우리 영화시장의 관객은 눈만
있는 관객이 아니니까. 우리에게도 하루빨리 우리 여성들의 문제를
비롯한 이 땅에서 제대로 소리내지 못하는 민중들의 문제를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 영화들이 대중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영화가 끝나고 앞에 앉아 있던 두 분의 수녀님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부의 용기에 대한 동조와 감동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도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파고 들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생각과 함께 두 분의 수녀님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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