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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이야기1>선생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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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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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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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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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118
선생님, 파이팅!
정윤미(양천여고 교사)
1996년 10월 어느날.
교장실 문이 뒤에서 닫혔다. 임신 9개월의 둥글게 부푼 배를 안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운동장 한켠의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높고 푸르르고 운동장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이 가을하늘을 수놓고 있다. 뱃속에서 엄마 마음이 느껴졌는지 아기가 꿈틀거린다.
'아가야, 엄마 마음 알고 있지? 괜찮니?' '엄마, 저는 괜찮아요. 힘내세요.'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조금 아까 교장실에서 나눈 대화가 머리에서 뱅글거린다.
"교장선생님. 저희 학교 출산휴가는 30일입니다. 그 기간으로는 산후 몸조리를 충분히 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60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요? 예전에는 애 낳고 바로 밭도 매고 논도 매고 했어."
"의학적으로도 산욕기는 6주에서 8주까지이며 요즘 산휴 2달은 기본입니다. 3달이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인 요즈음, 1달은 비인간적인 처사가 아닙니까?
"다른 선생들 모두 1달만 쉬고 나와서도 잘만 다니던데 당신 몸이 허약한 거 아냐?"
"모두들 괜찮았던 것이 아닙니다.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무리가 되었어도 모두들 참았던 거죠."
1달만 쉬고 나온 10여명의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도 수업을 해야 했고, 뼈가 미처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는 바람에 지금도 통증을 호소하고 있으며, 둘째 아기를 유산한 후 첫째 아이 때 충분히 못 쉬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책하던 K선생님, 또 30일만에 그야말로 팔뚝만한 갓난아기를 아줌마나 친지에게 맡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출근한 후 하루종일 눈에 밟혀 눈물짓던 그들의 고통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뱃속의 아기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다시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산휴 60일울 보장해 주십시오."
"이 사람, 교사라는 사람이 학생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하는구만. 수업결손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쉴 생각만 하는거요?"
"그게 아닙니다. 교사가 건강해야 수업에도 열의를 쏟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성교육을 하는 여자고등학교에서 여교사의 기본권인 모성보호를 도외시한다면 학생들에게 무슨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한 질문이 기억났다.
"선생님, 우리 학교에서는 여자선생님들이 애기낳고 1달만에 나오신다면서요?" "야, 그것도 몰라서 물어보냐? 사립이잖아, 사립."
아이들끼리 주고 받는 그런 이야기에 앞에 서 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 글쎄, 안돼요. 학교 재정도 힘들고 당분간 할 수 없어요.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지 어쩌겠어."
교장실 문이 닫혔다. 운동장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교무실로 왔다. 교장실에서 있었던 대화를 상기하며 임신 9개월의 어느 여교사는 그렇게 눈시울 뜨거워진 채 앉아 있었다.
그때 여자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모두들 분노, 분노, 분노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함께 하자." 어느 선생님의 말은 우리 모두의 이심전심 통한 마음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1달만 겨우 쉬고 나온 선생님들, 이미 출산이 끝난 선생님, 아직 미혼인 선생님들... 모두 여성의 신성한 모성을 짓밟는 현실 아래서 뜨겁게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싸움은 작년말, 나의 출산의 경우엔 산휴 1달, 병가 1달로 하되 1997년도부터는 산휴 2달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997년 4월~5월. 하지만 권리를 되찾는 과정은 그 이후에도 지난했다. 1997년도 들어서서 또 한분이 출산휴가에 들어갔는데 교장은 재정을 핑계삼아 작년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뒤엎었고 1달만 쉬고 나오라는 압력을 계속하였다.
우린 다시 처음부터라는 각오로 산휴 2개월 확보를 위한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여성단체와 연계하여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교육부, 노동부에 진정을 하였으며 각종 여성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우리의 싸움을 지원해주며, 학교로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결국은 일간신문에 보도되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나 하는 여론을 확산시키게 되었다. 교육부에서는 서울시 교육청으로 우리의 진정을 이관하였고 그 곳에서 산휴 1달은 위법사항이었으며 감독소홀의 책임이 있음을 추궁한 끝에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노동부에 진정한 결과 처리 시한 마지막날, 수세에 몰린 교장은 이사회를 열어 여교사 특별휴가 조항 중 산휴를 30일 이내에서 60일로 시정하였다.
이제 우리 학교에서도 출산후 60일을 마음 편히 쉬게 되었다. 이사회 처리결과를 통보받던 날, 권리를 제한하는 독소 조항의 몇 글자를 고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눈물과 땀방울 그리고 시간이 필요했던가를 돌이켜보니 새삼스러울 뿐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제 우리학교에서 이 일을 함께 했던 여교사들은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뜻을 갖고 뭉치니 역사는 전진했던 것이다.
함께 한 여선생님들, 옆에서 힘을 준 남선생님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 여성신문사, 여성민우회, 여성노동자회... 또 무엇보다도 항상 "힘 내세요"하던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이 작은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큰 승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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