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회원 이야기_여름이 이렇게 지나갔다
회원 이야기
여름이 이렇게 지나갔다
모리 | 여는 민우회 회원
매일 2시간씩 지하철을 타는 사람.
0.
지하철 안에서 길을 묻던 남성이 계속해서 말을 걸며 몸을 붙여왔다. ‘공중밀집추행’1)을 감지하고 대화를 끊어내고 피했다. 내가 제대로 판단한 것인지 자문하는 사이 그가 다른 여성에게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가해자는 흠칫 놀라며 떨어져 나갔다. 반 정거장 정도를 지날 동안 어떻게 항의해야 적절할지 고민했지만, 내게 끼얹어진 성적 불쾌함이 목에 고여서 끝내 정돈된 말로 꺼내지 못했다. 어물거리는 사이에 그는 내게 목적지라고 밝혔던 역이 아닌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려 사라졌다(6/5).
1.
112에서 지역관할서, 지하철경찰대, 인근 경찰센터, 담당수사관(남경)으로 연결되는 동안 사건설명을 반복했다. 남경은 용의자를 특정하고 추적을 시작하면서, 증거가 내 진술뿐이라 법리다툼이 있을 수 있다고, 피해상황에 대해서 증언하고 조서를 써야 하는데 계속 진행할지를 재차 물었다(6/7). 답을 할 때마다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누군가 유사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내가 남긴 공적기록이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나, 적극적으로 가해자를 잡아 단죄해야 한다는 정도까지는 아닌 애매한 마음이었다.
2.
사건이 접수되고(6/9) 피해전담조사관(여경)에게 두 차례 조사를 받았고(6/18 & 7/19), 일정이 꼬이면서 남경에게 추가로 전화조사를 받았다(7/17). 용의자도 두 차례(7/13 & 7/18)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몇 번의 번복 끝에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거부했고, 용의자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날에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는 사이 용의자는 출국했다. 재입국시 출입국관리소에서 바로 검찰에 통보되어 조사가 재개되므로 아마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소식을 들었다(10/10).
3.
나는 가해용의자가 나에 비해 명백히 법적으로 약자의 지위에 있는 외국인이라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는 사법절차상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다고 들었다. 내 짐작 속에서 용의자는 어느 때는 젠더권력을 휘두르는 뻔뻔한 가해자였다가 어느 때는 갈등에 휘말렸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무력한 소수자였다. 그간 들어온 경찰 수사과정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들과 담당경관들의 친절과의 괴리에서 경찰의 선의를 온전히 믿기가 어려웠다. 때때로 경찰의 뭉툭한 말들에 멍이 들면서도, 그들이 나와 가해용의자를 비슷한 정도의 신뢰를 가진 타인으로 대하는 점에 안도했다. 그게 그 경찰이 공정하게 수사하고 있다는 신호로 느껴졌다.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해 온 것은 경찰인데 왜 비용은 내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치르고 있었을까.
4.
거짓말탐지기 제안을 받고, 조금만 긁혀도 온통 물을 뿜어낼 것 같은 상태가 되었었다. 나는 이미 사건이 발생한지 나흘 만에 가해자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상의가 긴팔인지 반팔인지, 어느 방향에 섰는지 하는 기억도 뭉그러졌다. 어느 날에는 전혀 다른 키와 체형의 사람이 비슷한 위치에 섰을 때 사건당시의 감각이 확 되살아나면 하루의 기분을 망쳤다. 어떤 날은 만원 지하철에 낑기면서도 아무도 ‘그런 식으로’ 닿지 않을 때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은 아니라고 안도하기도 했다. 비슷한 사례를 참고하려고 공중밀집추행을 검색해 보았다가, 법무법인들의 광고를 통해 시장이 누구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형성되는지만 확인했다. 그 전의 수많은 설명하고 해명해야 했던 상황들에 느꼈던 감정이 부옇게 일었다가 가라앉는 탁한 여름이었다.
5.
국선변호사로부터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흔들리는 동안 나를 지탱한 건 가까운 거리의 여성들과 이어져있다는 감각이었다. 늘 경찰서에 함께 가준 친구, 남경의 그 말들은 2차 가해다라며 화를 내 준 직장 선배, 두서없이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들어주던 사람들의 지지로 여름을 났다. 낙엽이 지듯 모든 소요가 흩어지는 가을이 왔고, 오늘도 나는 별 일 없이 지하철을 탄다.
1)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1조에서 말하는 ‘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 대중교통수단, 공연·집회 장소, 그 밖에 공중(公衆)이 밀집하는 장소에서 사람을 추행하는 성범죄를 말한다. 본 글은 사건을 겪고 신고와 조사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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