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6월호 [민우역사기행]키 162cm면 승강기 단추를 더 잘 누르나?
민우역사기행
1994년 용모차별 모집채용 기업 고발 사건
키 162cm면 승강기 단추를 더 잘 누르나?
최명숙
‘저 아이는 아닌데...’
조그맣고 새까만 그리고 뚱뚱한 아이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선생님 얘기를 듣고 있고, 그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 마음은 덜컹 내려앉는다. 그 아이는 밤잠 안자고 공부해서 전교 1등을 한다고 해도. 자격증을 다 딴다고 해도 취직은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계 학생들이 일류대학을 목표로 하듯이, 상업계 학생들은 대기업 취업이 목표이다. 그렇지만 기업은 저 아이가 ‘키가 작다’고 떨어뜨리고, ‘뚱뚱하다’고 떨어뜨리고 ‘인상이 좋지 않다’고 떨어뜨릴 것이다.
기업이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제시하는 추천자격에 키나 몸무게, 용모단정이란 꼬리표를 붙이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선생님의 좌절감과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기업들의 여직원을 뽑는 인사관행에 휘둘려 학교는 엉망이 되고 있었다.
1994년 키 몸무게 제한한 44개 대기업 고발
94년초 여자상업고등학교의 취업담당선생님이 졸업예정자를 추천해달라고 기업이 학교에 보낸 추천의뢰서들을 들고 민우회를 찾아왔다. 추천의뢰서에는 키 160cm 이상, 몸무게 50kg 이하, 안경착용 불가, 용모단정, 미혼 등 다양한 제한조건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학생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응시조차 할 수 없기에 많은 학생들이 공부보다는 살빼는 약을 먹거나 미용술, 성형수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파행적 교육현실을 바꿀 방법이 없겠냐는 것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실태파악에 나섰고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1994년 5월 25일 민우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학부모회 등 여성과 교육 관련 단체 대표, 대학교수 등 33인의 명의로 44개 대기업을 헌법 제11조 1항(국민의 평등권 보장), 제32조 4항(근로의 권리보장), 남녀고용평등법 제6조(모집과 채용) 위반으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고발된 기업체는 재벌그룹계열의 대기업과 금융계, 백화점, 항공사 등이었고 모집직종은 금융기관의 창구업무, 승강기 안내원, 판매직원 및 판매안내원, 일반사무직 등이었다.
44개 기업 중 27개 기업이 160cm 이상의 키를, 13개 기업이 158cm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 은행의 승강기 안내원의 경우 키 162-167cm, 몸무게 50kg 이하, 시력 1.0 이상을 채용요건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 키와 몸무게면 승강기 버튼을 더 잘 누르나? 실소를 금치 못할 상황이다. 업무수행상 불가피성이나 실질적 관련성은 찾기 어려웠다.
키와 몸무게 등 신체적인 조건과 용모를 기준으로 여직원을 뽑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알고 있었지만 고발을 계기로 명백한 물증이 드러나면서 언론에서도 크게 취급하였고 사회적 충격과 관심을 모았다. 고발장을 제출하고 그날 오후 민우회와 전교조는 경제인총연합 건물 앞으로 달려가 이러한 채용관행에 대한 항의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고발사건이 알려지면서 민우회에는 당사자인 상업고 여학생들, 학부모들의 격려전화가 걸려왔고 면접시 차별을 경험했다는 상담도 이어졌다.
고발 이후 기업들은 학교에 보내는 공문에 이전처럼 키 제한 등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전화 등을 통해 기존의 조건을 계속 요구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기업들은 이미지상 어쩔 수 없다, 고객들이 원하고 있다, 서비스업종에서 용모제한은 어쩔 수 없다, 남녀차별이 아닌 여성과 여성간의 차별이다, 기업 돈주고 부릴 직원을 맘에 드는 사람 뽑아 쓰는데 뭐가 잘못이냐 등등의 항변을 늘어놓았다.
“남녀차별인가, 여성간의 차별인가?”
당시 한 일간지의 기사제목이다. 여성간 차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여성에게만 용모라는 특정조건을 적용한 것이므로 남녀간 차별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에 해당하는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간의 차별로 보아야 하므로 위법성 인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언론뿐만 아니라 근로감독관, 검찰의 입에서도 ‘여여(女女)차별’론이 슬금슬금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심상치 않은 흐름에 맞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교수들이 ‘모집채용고발사건대책교수모임’을 결성하여 6월 30일 의견발표회를 가졌다. 이 사건의 본질과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명확히 하기 위해 철학·경제학·여성학·법학·인류학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접근하였고 의견발표회 결과를 검찰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고발 이후 7개월간 침묵을 지키던 검찰은 1994년 12월 30일 연말연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8개 기업만 1백만원 약식기소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검찰결정이 나오기 전 무혐의처리하겠다는 방침이 모 일간지를 통해 이미 기사화된 바 있었다, 사전에 여론을 떠보기 위한 ‘작전’으로 파악한 민우회는 검찰 항의방문을 하였고 12월 15일 민우회, 전교조,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서울지방검찰청 앞에서 용모제한 기업에 대한 기소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검찰은 변함이 없었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결정 내용과 이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 검찰, 8개 기업만 100만원 약식 기소
동시에 혹은 근접한 시기에 동일 분야의 남성에게는 요구하지 않은 조건을 여성에게만 부과한 미도파, 코오롱상사, 신원, 기아자동차, 삼성물산,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등 7개 업체와 면접시기는 다르지만 동일분야에 남녀를 뽑으면서 여자에게만 신체조건을 부과한 대한교육보험만을 약식기소하여 벌금 1백만원에 처한다.
● 32개 기업 무혐의 처분
여성에게 특정한 신체적 조건을 요구한 32개 기업에 대해서는 여성만을 채용하는 분야에 여성에게 조건을 부과한 행위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며 무혐의 처리를 내렸다. 남녀고용평등법의 주요취지는 남녀간의 차별을 막는 것이므로 비교대상이 되는 남성과 여성이 있어서 여성을 남성과 다르게 대우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어야 법 위반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4개 기업 불기소처분
남녀를 동시에 뽑으면서 남녀 모두에게 동일한 신체조건을 적용한 4개 기업에 대해서는 불기소처분을 하였다. 남녀의 평균신장을 비교하여 여성에게 더 불리한 경우는 남녀차별로 볼 수 있으나 그러한 경우에도 법을 위반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남녀차별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검찰 결정의 문제점
첫째, 남녀고용평등법의 입법취지와 차별의 정의 규정을 무시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민우회, 전교조 등은 1994년 12월 30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검찰이 (중략) 지나치게 형식논리에 빠져 남녀고용평등권법 원리를 그르치고 있다”, “검찰이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법을 해석하는 것은 법규정의 자구에 얽매인 결과 남녀고용평등법의 입법취지를 망각한 조치이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광범위한 직종차별을 합리화한 것이다”고 반박했다.
둘째,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기업이 직원 채용 때 남녀를 분리모집하면서 여성에게만 비합리적인 기준을 계속 적용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게 된다. 검찰처럼 ‘여여차별’로 본다면 직종이나 직급을 제한하여 여성을 채용하는 경우 비교대상인 남성이 있을 수 없어 업무, 배치, 승진상의 성차별은 합리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4개 기업에 대해 법위반 의도가 없기 때문에 불기소처분한다고 했는데, 이는 행위가 가져온 결과인 차별을 무시한 결정이다. 폭행이 일어났지만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넷째, 검찰은 직무수행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용모기준에 의해 응시조차 못하는 여성들의 노동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결국 여성에게만 신체적 조건과 용모를 채용기준으로 두는 것 자체가 바로 남성중심적인 성차별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남녀차별인 것이다. 서울지방검찰청의 결정에 불복, 고발인들은 95년 1월 27일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를 하였다. 항고 10여년이 지났지만 민우회는 아직까지 그 결과를 통보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고발사건은 1995년 8월 4일 남녀고용평등법 2차 개정시 관련 조항 신설로 또 하나의 성과를 나타냈다(제6조(모집과 채용) ②사업주는 여성근로자를 모집. 채용함에 있어서 모집. 채용하고자 하는 직무의 수행에 필요로 하지 아니하는 용모, 키, 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미혼조건 기타 노동부령이 정하는 조건을 제시하거나 요구하여서는 아니된다.)
모집·채용 시의 용모제한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유와 신체적 조건의 이중적 제한을 부과하여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차별적 지위와 역할, 심각한 외모지상주의, 왜곡된 교육현실 등 수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문제이다. 모집·채용 시의 용모제한을 한 44개 기업을 고발하고 그에 따른 대응활동은 여성의 능력보다는 용모를 중시하는 사회적 통념과 고용관행에 문제제기를 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모집채용상의 성차별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모집·채용에서의 성차별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접근조차 못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일할 권리를 제한하고 남녀 분리 직무와 직종·직군을 형성하며, 임금, 승진 등의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전제로 작용된다. 그러기 때문에 민우회는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대응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최명숙 요즘엔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며 운동하고
생활요리 배우며 잘먹고 잘놀고 있지만, 한때는 이런 사람이었다우.
"나 키 작아도 일 잘하는 여자야"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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