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12월호 [민우역사기행] 농협사내부부 대량해고사건 그 4년간의 기록 당신의 결혼을 알리지 마라!
최명숙
“…… 제손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으로서 대한민국의 어느 여성이 ‘네가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네 남편에게 불이익을 준다는데’ 사직서를 안내겠습니까? 저 또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쭛쭛쭛의 부인이 아니고, 계약직 사원 김미숙이 아닌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김미숙이 작성한 진정서 중에서)
1992년 1월 농협중앙회(이하 농협)에 입사한 김미숙씨는 1999년 2월 20일까지 정규직으로 근무하다 2월 21일부터 계약직 신분으로 이전의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김미숙씨가 1999년 1월 25일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997년 직장동료와 결혼한 사내부부이기 때문이다.
762쌍의 사내부부 중 752쌍이 명예퇴직,
그리고 볼모로 남겨진 사람들
1999년 1월 농협 구조조정 추진계획이 발표되면서 사내부부들의 불안은 본격화되었다. ‘상대적 생활안정자’라는 이름으로 사내부부 직원들은 명예퇴직과 순환명령휴직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김미숙씨 남편 역시 지점장 면담과 인사과의 독촉전화를 받았으나 부부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기운내자고 했다. 명예퇴직 신청 마지막날이 되자 김미숙씨는 아침부터 지점장의 면담과 인사과의 빗발치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명예퇴직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부직원 중 남편은 휴직명령을 받고 아내는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거나 앞으로 축협 등과의 통합과정에서 남편이 우선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이 되는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 남편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느냐, 남편을 잘 내조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 아니냐 등등…… 김미숙씨와 남편은 여러 통로를 통한 압력과 시달림을 받으며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내다가 명예퇴직신청 시간이 넘어가자 안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협측은 신청기간을 연장하면서 계속적인 퇴직 압력을 가했고 김미숙씨는 1월 25일 결국 사표를 쓰고 말았다. 그렇게 농협에 근무하던 762쌍의 사내부부 중 752쌍이 명예퇴직을 신청하였고 그 가운데 688명이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농협은 이렇게 강압적으로 인원을 감축할 만큼 경영상 긴박한 사유가 있었는가? 1998년도 기준 농협은 372억원의 흑자를 냈고, 1차 명예퇴직시 목표로 한 인원을 훨씬 초과했음에도 2차 명예퇴직을 강행하기까지 했다. 또한 명예퇴직한 여성 1,932명 중 1,056명(66%)을 정규직의 50%에 불과한 임금을 주는 계약직으로 재고용하였다.
경제위기를 틈타 여성들이 1차적인 해고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응하여 ‘여성우선해고반대운동’을 펼치던 민우회는 농협사내부부해고자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통로를 통해 수소문했다. 농협의 사내부부해고는 사회문제화되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이미경의원 등은 노동부의 대책 마련을 강하게 요구했고, 특감을 한 노동부는 5월초 농협의 성차별적 구조에 대해 엄중경고를 하기도 했으나 당사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농협에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표를 낸 이유도 남편이었고, 부당해고에 나서지 못한 이유도 남편이 농협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가는 ‘독한 여자’ 또는 ‘남편을 잡아먹는 여자’로 비난받게 되는 현실이었다.
“아내가 퇴직한 사례가 많다고 하여 여성을 차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99년 1월 농협에서 사내부부 해고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몇 개월 후인 1999년 5월 11일, 민우회가 마련한 <농협 성차별적 구조조정 대응을 위한 교수간담회>에 김미숙씨, 김향아씨가 불안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간의 경과를 말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눈물나게 만들었다.
5월 13일 김미숙, 김향아 해고자 2인, 여성단체 대표·교수 등 25인은 헌법,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혐의로 농협을 고소·고발하였고, 6월 해고자 2인은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두고 농협측 변호사는 준비서면에서 “ …… 추후 여성운동단체들이 이건 명예퇴직에 남녀차별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혹 복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 불과합니다.”라고 했다(피고측 준비서면에는 원고들은 여성운동권자, 여성운동자, 여성권리신장을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서 부추김을 받았음을 수없이 반복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로펌인 K&C에서 쓴 이 준비서면은 당시 인구에 회자되며 인기를 누렸다.)
1999년 5월에 본격화된 농협 사내부부 해고에 대응한 싸움은 다른 사내부부해고자들의 2차, 3차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으로 이어졌고, 김미숙 김향아 소송건에 대해 2002. 11. 8 대법원에서 해고무효확인소송이 기각되기까지 4년 넘게 계속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히 법정싸움은 아니었다. 성차별적인 노동현실에서 발생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에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실천활동들이 있었다. 변호사, 교수, 연구자 등 많은 전문가들이 결합했고 수많은 연구자,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검찰과 재판부에 의견서, 탄원서, 촉구서를 제출했고, 예비취업자들까지 나서 농협중앙회 앞에서 ‘내 결혼을 알리지 마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집회와 농협통장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대중적인 활동으로 검찰과 재판부에 엽서쓰기를 하면서 2001년 7월 22일부터 8월 23일까지 5주간에 걸쳐 여성단체 대표뿐 아니라 민우회 회원, 학생들이 참여하여 대법원앞 릴레이 1인시위를 하기도 했다(활동일지 참조).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이라 부당해고 여부는 법정에서 판가름 날 수밖에 없었기에 사표를 쓴 것이 강압에 의한 것인가, 진의(眞意)인지 비진의(非眞意)인지에 대해 원고, 피고 변호사 간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화여대 조순경 교수, 김미숙씨 등이 참고인과 증인으로 출석한 재판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원고측 김진 변호사의 활약으로 농협측의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과 사내부부를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시킨 부당성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1심, 2심 모두 원고 패소로 나오고 말았다.
서울고등법원 민사 제18재판부는 “피고가 부부직원들인 원고들과 그 남편들에 대하여 수차례 명예퇴직을 종용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원고들의 남편들이 순환휴직대상자가 될 것이고, 그후에 복직이 불투명하며, 그들이 바로 정리해고대상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고지하였다는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그러나 명예퇴직 의사표시가 강박에 의한 것이거나 비진의표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피고가 순환명령휴직대상자를 선정하거나 정리해고를 실시할 경우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보아 경제적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부부직원의 일방을 그 대상자로 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리기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되지는 아니하고, 피고가 인원감축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부부직원의 일방을 대상으로 정하였을 뿐 아내인 직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은 앞서 본바와 같으니 그 어느 편이 퇴직할 것인가는 당해 부부가 자율적으로 판단할 사항(실제로 남편이 퇴직한 경우도 있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이라 할 것이므로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용인되는 그와 같은 퇴직의 종용을 두고 실제로는 아내인 사원이 퇴직하는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정만을 들어 곧바로 헌법이나 근로기준법 등이 정하는 남녀평등에 반하여 여성을 차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할 것이다.”고 했다. 재판부는 사내부부의 현실을, 남녀고용평등법이 만들어진 취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린 것이다. 2심 판결의 논리를 기조로 2002년 11월 8일, 대법원 또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사직서를 스스로 낼 수밖에 없는 매커니즘과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부당해고 여부를 다투어보지도 못하고 1심에서부터 패소한 농협사건뿐 아니라 노동현장에서 이같은 상황이 계속 발생하자 민우회와 민주노총은 차별적 해고 대응지침서 <사직서는 절대 안돼! 차라리 해고를 당하라!>를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알리안츠 제일생명 사내부부해고사건은 승소하기도
이러한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83명의 사내부부 여성들이 집단해고당한 알리안츠 제일생명의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은 2002년 2월,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강요된 사직은 해고’라는 원고승소판결을 받는 기쁜 소식도 있었다. 사내부부라는 기준을 정해 부부 중 일방이 나가도록 종용한 것은 ‘강요’이므로 이는 ‘사직’이 아니고 ‘해고’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 대법원에서 승소하였다. 같은 경험을 한 애달픈 마음으로 ‘농협소송 후원의 밤’에 참가했다가 용기를 얻어 소송을 시작한 알리안츠 제일생명 해고자들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민우회와 울고 웃으며 그 고비들을 넘겼다.
농협사내부부해고사건은 4년이라는 긴 과정을 거쳤고 법정에서는 ‘패소’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남성 1인생계부양자논리에 의해 맞벌이기혼여성의 경제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차별적인 ‘여성’해고의 본질을 은폐하고, 혼자 버는 사람보다 둘이 버는 쪽이 짤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논리에 문제제기를 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의 차별금지기준, 남녀고용평등법의 남녀고용평등업무처리규정에 성차별적 해고 기준으로 명문화되기도 했다. 특히 사내부부해고와 같은 성차별적 해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른 사업장에 영향을 미치면서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는 많은 사내부부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김미숙씨, 김향아씨를 만난 건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찬바람이 부는 2008년 겨울, 또다른 김미숙씨, 김향아씨를 만날까 두렵다. 아니, 어쩌면 만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전반적으로 보수화되는 탓에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경제위기 속에서 여성우선해고를 당했다고, 사내부부해고를 당했다고 소리조차도 내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게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힘들고 아픈 기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뜨거운 열정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던 10여년 전의 일들이 떠오른다. 힘들면 힘들다고 부당함을 느끼면 부당하다고 소리칠 수 있고, 그걸 들어주며 함께 해결의 길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명숙 ● 사내부부해고사건 백서를 넘기다보니 농협과 알리안츠 분들과
소송을 준비하며 영상물을 찍으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올해가 가기 전에 잘 지내고 있는지 전화통화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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