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10월호 [기획 -자발적 소수자]자발적 소수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자발적 소수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박건 ●
누군가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속칭 ‘표준형 인간상’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벗어난 만큼의 자유와 자부심이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은 벗어난 그 크기나 폭 만큼의 강력한 사회적 모욕과 무시가 그 개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개인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에서의 ‘축출’을 의미한다. 즉,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가 박탈되고 무언가로부터 배제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 단지 많고 적음의 양을 나타내는 중립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단어에서 왠지 피해야 될 것 같으면서 다소 부정적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 때문이다. 그런데 소수자의 앞에 ‘자발적’이라는 다소 상큼 발랄한 언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개인과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만큼 사회가 소수자들을 포용할 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일까? 아니 상큼한 단어가 등장했다고 하는 것이 결코 그 자체로 자발적 소수자들에게 상큼하고 안락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왜 자발적으로 소수자가 되려는 것일까?1) 그리고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굳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아도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소수자 대량생산공장이기도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태도나 신념 혹은 가치로 인하여 ‘자발적’ 소수자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탈선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제약과 제지를 받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A씨의 경우 회식메뉴 한번 정하기 힘들다는 직장동료의 타박을 받기도 하지만, 웰빙시대를 선도하는 사람으로 매스미디어에 의해 조명받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에 따라 병역거부를 한 C씨의 경우 그 탈선의 정도가 매우 크다는 사회적 심판에 근거하여 그 개인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완전히 가로막히기도 한다. 사회적 처벌의 정도를 따지자면, 1인 가구로 살아가는 B씨의 경우는 A씨와 C씨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병역거부 C씨의 경우 기존 실정법과의 마찰 등의 문제 때문에 또 다른 생각의 장이 필요하겠지만, 현재 실정법에 위배되지 않는 수많은 형태의 자발적 소수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잠재적인 자발적 소수자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사회가 강요하는 어떤 특정한 기준에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떤 형태이든 차별행위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없어야 한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일 것이다. 윤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실제로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고 해서, 레게머리를 하거나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휴대전화 하나 없이 산다고 해서 처벌받거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실제로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더구나 어떤 차별행위가 가시적으로 없으니 차별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이들에 대한 부러운 시선도 있으니, 더욱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거부하고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로 들어가 살면서 자연과 소통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시선은 단지 그들이 우리의 곁에 살면서 우리의 삶을, 즉 정상적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때까지만 부러운 시선일 뿐이다. 그들의 삶이 ‘정상’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우리사회의 표준을 교란하기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이단아이고, 사회부적응자이며,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다른 별세계의 사람이며,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삶이 우리들의 소위 ‘정상적’인 삶의 일부분이 될 수도 있음을 애써 거부한다. 그래서 ‘괴짜’니 ‘별종’이니 하는 이상한 이름붙이기가 지속된다. 그러한 거리두기는 여전히 현재에도 진행 중 이다.
또 다른 의미로 이들 자발적 소수자들에게는 삶은 그냥 막막하고 처절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로부터 처절하게 낙인찍힌 비자발적(?) 소수자들과는 달리 언제라도 회귀본능에 따라 ‘정상성’으로 복귀할 수도 있는 어떤 자발적 소수자에게는 그냥 자기 계발과 발전의 과정이고,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우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나 혹은 무모한 이름붙이기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시선이 자기 삶을 스스로 잘 영위하고 있다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이 정도 결심도 없이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남들한테 인정받으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라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시선과 이름붙이기는 그냥 놔둬도 괜찮을 것일까? 스스로 다 알고 선택했으니, 그 과정에서 그 정도의 불이익이나 혹은 무시 같은 일 정도야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그것을 즐기고 있으니,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이러한 시선을 즐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여야 할까? 어떤 것도 적합한 답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구조나 체계가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런 일에 대해서조차 반응하지 않는 사회체계는 다른 부분에 대한 민감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나는 우리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이 좀 더 긍정적이고 포용적이기를 희망한다. 개인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사회의 근본적인 고민이 좀 더 진행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내연과 외연을 좀 더 확장시켜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정당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이들을 둘러싼 숱한 오해와 편견이 바로잡히고, 우리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더 많이 알아 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시도는 우리 사회 구성원을 포용하지 않으려는 시도이며, 현재의 협소한 틀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근거하는 사회의 기본 구성 원리를 스스로 해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꿔본다. 언젠가는 다수자들의 삶이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코너에 소개되는 그 날을 !
현재의 사회는 끊임없이 소수자를 양산해낸다. 사회의 문화가 각종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평가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인간들과 사물들을 분류하는 가치평가 체계로 기능하는 한, 이러한 소수자양산 시스템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결국에는 소수자일 뿐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다수자 집단에 속하겠지만, 다른 나머지 부분에서는 소수자 집단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 소수자이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감추고,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습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나도 ‘나’이고, 저런 나도 ‘나’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인간의 완전한 자기발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단어에 깊이 침잠된 부정적 의미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생기발랄하고 정렬이 넘치는 긍적적 의미로 그 뜻이 다시 아로새길 그날까지 격하게 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박건 ● 철이 없는 것인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지 알 수 없는 미성숙 불완전 자연생명체, 놀았던 지역은 사회학동네
1)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발적이기 보다는 타의에 의해 소수자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고? 우리의 사회에는 우리의 조그마한 시도도 모두 소수자의 모습으로 낙인찍어버리는 그런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내가 소수자냐고? 이런 한탄이 나올 법하기도 하지만, 실제 삶은 퍽퍽하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자발적 소수자’가 매우 다른 용례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그건 일단 이 글의 관심대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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