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12월호 [쟁점과 현안]성폭력 사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성폭력 사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우리는 ‘모든’ 성폭력에 반대합니까?”
- ‘조oo 아동 성폭력 사건’1) 이후의 논란을 돌아보다
최김하나(하나)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
지금의 잠잠함을 선뜻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지난 추석 무렵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조oo 아동 성폭력 사건’은 사람들을 분노하고 경악하게 만들었다. 성폭력 가해 수법은 잔혹했고, 가해자는 반성과 사죄 대신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듯 보였다. 성폭력 사건 자체는 물론, 그 이후의 지난한 처리 과정에서도 8살 난 피해자가 몸과 마음에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받았을지 상상하기에도 벅찬 일이었다.
1심에서 최고 형량인 무기징역이 구형되었으나, 가해자가 고령이고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였다는 점이 감형사유로 적용되어 12년 형이 선고되었고, 이후 가해자의 항소, 상고 모두 기각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네티즌들의 격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분노의 감정들은 주로 ‘평생을 불구로 살게 된 불쌍한 소녀’, ‘여성으로서의 삶을 마감시킨 성폭행 피해’ 등의 표현으로 표출되었고, 따라서 가해자에 대해서는 ‘12년은 너무 짧다, 사형도 부족하다’, ‘모든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평생 전자발찌를 채워 격리·감금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빗발쳤다.
우리 상담소에도 자연히(?) 파장이 미쳤다. 사건과 관련한 문의전화가 잇따랐고, 어렸을 적 성폭력 피해경험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어 상담을 원한다는 내담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늘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사건들은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그 중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극소수 사건들의 경우 가장 자극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화제가 집중 되는 현상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갈등상황은 곧이어 찾아왔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촛불집회를 알리는 글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상담소에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혹은 기대가 점점 밀려들었다. 당혹스러웠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공론의 장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할지, 이제껏 해왔던 성폭력 상담이나 성교육 같은 무수한 활동들이 어째서 이번 사건과 연결되어 읽히지 않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사이 가해자에 대한 신상정보와 추측성 소문들이 난무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것의 주된 정서는 성폭력 사건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기보다는 잔혹한 범죄행위에 대한 공분이거나 기회를 포착한 집단적 분출/해소 행위에 가깝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집단행동으로까지 분출되어 나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늘 그렇듯 ‘냄비’ 취급하고 넘겨 버리기엔 상황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례적인 국민 반응에 대통령이 직접 사건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즉시 가해자 ‘조oo’의 가석방을 금하는 법무부장관의 특별지시가 떨어졌으며, 유관부처들의 입장 발표와 대책 마련 약속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또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늘 그렇듯 사후 대책, 전시 행정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 기관들. 여기에는 분명히 성폭력 문제에 대한 입장차가 존재한다. 성폭력은 유별난 몇몇 이상한 사람들의 일탈적인 돌발 행위이고, 따라서 이들을 ‘선별’하고 ‘격리’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해결하겠다는 논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친인척 등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아동 성폭력 사건들을 숱하게 접하는 입장에선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기존의 성폭력 통념이 고스란히 담긴 격렬한 반응들이 인터넷 공간을 오가는 틈새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이러한 사건의 재발 방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자 하는 의견들도 제법 그 수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가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해자의 이름을 넣어 부르자는 방식을 제안하면서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있던 답답한 네티즌들 사이에 ‘성폭력 사건의 명칭을 피해자의 이름이 아닌 가해자의 이름을 넣어 부르기’ 움직임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안은 이미 수년 전에 대학원 조교 성희롱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서울대 신교수 사건’ 때부터 이루어졌고, 관련한 여성단체들에서 꾸준히 주장하며 실천해온 것이었다.) 때맞추어 각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이를 자사의 중대한 공식입장인 양 ‘선포’하면서 그 효과는 압도적으로 드러났다. 이제 ‘나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네티즌들이 서로 나서서 꾸짖었고 정치인들도 이에 질세라 ‘가해자 이름으로 명명하기’를 생색내며 언급했다.
이쯤 되자 내 마음 속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분명 그간 반성폭력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의 성과로 조금씩 유의미한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폭력 문제는 권력관계와 왜곡된 성문화를 점검하고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일상적인 성폭력 문제가 ‘비일상적 특정 사건’으로만 다루어지고 ‘아동’과 ‘성’ 그리고 ‘장애’, ‘사형’ 같은 자극적 단어들만이 되풀이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인지 막막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활동이 다름 아닌 ‘운동’이기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지금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과 에너지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과 외면 아니었던가. 성폭력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리 마구 드러낼 때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고민 끝에 우리 상담소도 10월 10일 서울시청 앞 광장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인터넷 상의 열기에 비해 집회 참가자들은 많지 않았다. 저마다 손 피켓을 들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 틈에 ‘성폭력 통념 O/X 퀴즈판’을 준비해 자리를 폈다. 성폭력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소통해보려는 마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우회원임을 밝힌 한 시민분이 이번 사건에 대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대응 방식을 문제제기하여 30분가량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 분은 ‘발 빠른 입장 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대중의 분노를 대대적으로 조직하지 않는 것은 여성과 아동을 위해 일한다는 단체에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며 거세게 항의하셨고, 이에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위주의 논의가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상의 성차별·성폭력적인 문화를 점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응방법을 고민하다보니 입장 표명이 다소 늦추어 진점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 한다’고 우리 상담소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기회를 활용하여 관련 법률을 강력하게 정비하는 것이 잠재적 피해자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그 분의 주장은 완고했다. 이후 만난 시민들과의 대화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 가해자의 형량과 처벌수위에 쏠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법을 추가하거나 처벌제도의 수위를 높이는 것 보다 현재 마련되어 있는 기준을 실제로 엄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열심히 전달하려 노력했다. 사람들 관심의 초점이 피해자를 지원하는 부분에 더 많이 맞추어지기를 바란다는 의견에도 많이들 공감하셨다. 다만 그 변화의 시작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점을 다들 어느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만감이 교차하는 사이 황당하게도 전경들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정부와 국회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믿고 돌아가시라’는 전경 간부의 안내 방송이 씁쓸할 따름이었다.
이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조oo 사건’에 관한 여론의 관심은 급격히 사그라졌다.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상담소를 비롯한 4개 단체 역시 일상 활동의 연장으로 10월 17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조oo 아동 성폭력 사건’ 거리 행동의 날> 캠페인을 진행했다. ‘성폭력 사건 시 음주를 감경사유에서 배제하기 위한 서명’운동과 함께 유인물 배포,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나의 실천 적기, 거리 성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서명을 요청하면 그냥 지나치려던 사람들도 ‘조oo 사건’을 언급하면 발길을 돌려 서명을 하고 유인물을 받아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음을 새삼 느꼈다. 다만 이러한 변화들이 그저 우연히 알려진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로 삼았다. “빨리 갈 수 없는 길이라서 ‘대의’라고 하는 것이다!”라던 ‘선덕여왕’의 ‘문노’의 대사처럼 느리지만 하나씩 반성폭력 문화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리라. 그 한 걸음으로 10월 26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아동 성범죄 양형기준 점검을 위한 회의를 소집한다기에 관련 단체들이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음주를 심신미약에 따른 감경사유에서 배제하라’는 5천여 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성폭력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따져보자. 성폭력 사건은 ‘잠재적 피해자의 조심’으로 예방될 수 없고, ‘잠재적 가해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방지할 수 있다. ‘잠재적 가해 가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변화의 시작은 나로부터 가능하다.
1) 일명 ‘나영이 사건’으로 KBS 시사보도기획 ‘쌈’을 통해 알려진 아동 성폭력 사건.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사건의 무게를 피해자에게 짐 지우는 방식이 아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조oo 아동 성폭력 사건’으로 칭함.
최김하나(하나) ● 진심을 오롯이 전할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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