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민우ing] 이 죽일 놈의 적령기
[민우ing] 이 죽일 놈의 적령기
강선미(폴) ● 한국여성민우회 반차별·회원팀
“그 나이쯤이면 ~은 해야지.” “그 나이에는 ~할 때이지.” “나이에 맞지 않게~” 라는 말 왠지 익숙하지 않나요? 민우회는 이 같은 말들, 특정 나이(대)에 따라 역할이나 적절한 행동까지도 고정하여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난 한 해 ‘적령기 고정관념 타파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상 속 적령기 고정관념 관련 사례 모니터링 및 분석은 4개월(2009년 8~11월)동안 모니터링단으로 활동한 숨, 와와, 폴이 인터넷을 통해 관련 커뮤니티와 신문기사를 검색하고, 각 영역의 사례들을 수집하여 분석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우리사회 내 나이주의 문제가 일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함께 실린 적령기 고정관념에 대한 웹툰은 나리맛탕님이 그려주셨습니다.
교육 적령기 “늦은 나이에…”
포털사이트 질문게시판에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공부 하고 싶습니다.’ ‘늦은 나이에 일본어 배우는 것에 대하여….’ 같은 식의 질문들이 정말 많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육적령기’가 지났지만 교육받기를 원함과 동시에 그것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교육받는 것, 새로이 시작하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 과연 배운다는 행위와 나이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
우리사회는 배움과 나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중요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관계가 있다손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저 나이에 무슨 공부’ ‘쟤 왜 학교 안다니고 염색 했어’ ‘네 나이에 무슨 대학원이야’ 따위의 발언과 참견의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업 적령기 “슬픈 20대 청춘이여”
이제 20대 중반이 되는데요. 대학을 늦게 가서 이제 졸업해요.
알바하면서 컴퓨터학원 다녀서 취업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나이에 취업안하고 이러고 있으면 심각하나요? 나이는 금세 먹고 미래는 불안하고.
연휴에도 아침부터 채용공고보고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이 슬픔.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네요! 집안어른들 눈치도 보이고 제 자신이 부끄럽고 그러네요.
설날 전까지는 취업할 수 있을까요? 슬픈 20대 청춘이여.ㅠ
닥치고 취업 카페(http://cafe.daum.net/4toeic) 게시판
20대 중반의 나이에 학원을 다니며 취업을 하려는 것이 왜 심각한 것일까? 이렇게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서 확인되기도 한다. 또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나이가 결합되어 그에 적합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 또한 가중된다.
위 사례에서는 취업을 못해서 ‘집안 어른들 눈치 보이고 제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슬픈 20대 청춘’이라 표현하면서 말이다.
1년 9개월째 백수(청년실업자, 주로 남성)인 아들도 모자라 딸까지 백조(여성청년실업자)가 된 뒤로 어머니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으신다. 모임 구성원 중 우리 집에만 백수·백조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족들끼리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면 예전과 다르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학교 다닐 때보다 줄어든 생활비 때문에 한 달 중 반 이상의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운 적도 있다. 길을 걸으면 모두 다 나를 비웃는 것 같다. 가끔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오마이뉴스, “백수·백조 남매 둔 울 엄마, 친구 모임도 끊으셨다” 中, 하지혜, 2008.10.27)
위 기사는 백수라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어머니는 백수 자녀 때문에 친구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취업난이 사회전반의 문제이니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취업 적령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과 가족)이 겪는 괴로움과 갈등은 이미 개인(가정)사를 넘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취업준비생 본인이든 그 가족이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유예 시기’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때’를 인정해주는 건 어떨까.
결혼 적령기 “왜 나이 먹으면 학교 가는 것처럼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언제 결혼할 건가요?”와 같이 결혼의 시기를 묻는 것은 일상적인 질문이 되었다. 질문에서 그치지 않고 ‘때를 놓쳐서 어떡하느냐’는 걱정까지 함께. 정말 결혼을 해야 할 ‘때(적령기)’라고 말하는 시기라는 게 있는 것일까?
30살 처자입니다. 직장에서 난리입니다. 과장님, 계장님부터 시작해서 동료들까지 왜 나한테 결혼 안하는지. 왜 주말에 남친을 안 만나는지. 제 옆의 동료와 제가 잘 어울린다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진짜 미치겠습니다. 제 직장이 보수적인 곳이라서 이 곳 사람들은 여자도 서른 살 이전이면 다들 결혼하는 거 같습니다. 무시하고 살 방법 없을까요.
대한민국 결혼 연령이 늦춰졌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선 30쯤에 대부분이 다 결혼합니다.
그게 당연한 대한민국내의 사회상이니까요.
저도 30살에 결혼했는데 그때까지 엄청 스트레스 받다가 거의 타의로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결혼하고 나니까 그때부터 아기가 왜 없냐고 스트레스를 주더군요.
당당하게 초월하시는 게 좋아요. 힘들겠지만.
인터넷 포털사이트 daum 게시판 중에서
결혼 연령이 늦춰졌어도 서른살쯤에는 대부분 결혼을 하고 그렇게 소위 적령기에 결혼을 하는 건 당연한 우리의 사회상이라고 하는 댓글, 서른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했더니 다음으로 출산의 ‘때(적령기)’에 대한 압박의(?)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던 댓글들이 있었다. 힘들겠지만 당당하게 초월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이 왠지 강하게 와 닿는다. 결혼 적기에 대한 압박감은 개인적인 삶의 방식 차이로 이해되지 않고 ‘일정 시기에 해야/거쳐야 하는 것’으로 적령기 결혼 고정관념이 사회적으로 조장되는 문제를 가지는 것이다.
문화 적령기 “4년 전 어린아이의 이야기”
그룹 2PM 멤버(재범)의 한국에 대한 비하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 가운데에서 ‘나이’와 관련한 공통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라고 바라보면 안 되나. 그 친구는 많이 어리다.
그 글을 썼던 4년 전이면 얼마나 더 어리겠나. 기자님도 돌이켜봐라. 그 나이에는 무슨 짓이건 할 수 있다. 심지어 나는 1~2년 전만 돌아봐도 한심했다.
앞으로 1년이 지나면 오늘의 나조차 한심해 보일 것이다.
4년 전 어린아이의 이야기에 그 정도의 관대함도 보여줄 수 없나.
(김c 인터뷰 - “음악으로 인권을 가볍고 쉽게” 한겨레21. 2009.09.18 778호)
태어나서 제 나라에 대해 푸념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어린 아이가 몇 년 전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한 마디,
그것도 친구한테 사적으로 했던 얘기까지 끄집어내어 공격하는 대중들...
(진중권 블로그, 미라클릭스, 마지막수업)
‘그냥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은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말인 것 같다가도, ‘어린아이의 이야기에 관대함을 보여주자’라는 것은, 나이가 어린 사람의 생각은 ‘인정할 필요가 없다(그래서 넘어가 주자)’는 말로 들린다. 이렇게 되면 다양한 사고 안에 어린 아이의 생각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된다. ‘어린아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어린아이가 아닌 사람의 푸념은 용인이 안 된다는 뜻일까? 글쓴이 스스로 나이와 관련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대중들에게 재범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찌 됐건 ‘어린아이’라는 표현으로 연령대를 굳이 나누어 가며 책임 있는 행동과 사고에 대한 기준치를 정해 놓는다는 것은, 나이가 어린 친구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신뢰를 가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령기 고정관념 사례 수집과 분석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각 영역 자체의 문제(취업이나 결혼을 권장·강요하는 ‘백수’나 ‘비혼자’에 대한 차별 등)와 그 안의 나이주의 즉, 적령기 고정관념 문제가 혼재되었다는 것이었다. 교육, 취업, 결혼보다 각각의 ‘때(적령기)’에 보다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의 소소한 삶 안에서 암묵적으로 적령기에 대해 ‘그렇지’하고 수긍하는 사례들은 얼마나 많던가. 이러한 사례들이 수긍하는 것은 ‘때가 있다’는 것 보다 ‘어떤 표준이나 규정’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어떤 표준이나 규정에 ‘나이’를 아무 불편함 없이 조합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떤 표준이나 규정’이 누구에 의한 것이며, 왜 그러해야 하는가하는 물음 없이 ‘적령기’라는 카드를 내밀 때, 우리는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을 스스로 실천하는 셈이지 않을까.
사례 및 분석 전문과 웹툰 전체를 보시려면, 반차별 블로그(http://blog.daum.net/tostar)로! :)
강선미(폴) ●
아침, 버스를 기다리며 흐읍-!하며 크게 심호흡합니다.
새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3월에는 도시농부가 될테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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