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6월호 [새로운 페이지] 불안과 의심이라는 버려지지 않는 짐을 지고서
[새로운 페이지] 불안과 의심이라는 버려지지 않는 짐을 지고서
이혜연 ●
결국,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
사실 거절하려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우~ 부끄러운데…. 자신 없어요”를 연발하면서도 확실히 거절하지 않고 쓸데없이 길게 통화를 했다. 그러다 끝내 쓰겠다고 했다. 내심 이런 글을 의뢰해주는 게 기분 좋았나? 부끄러운 나의 행보를 좋게 봐주는 것 같아서? 뭔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나? 후훗.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민우회 회원으로서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제 밤엔 괜스레 옛날 생각들이 떠올라 한참을 뒤척였다.
“사실, 노무사 일을 하다 연극을 하게 된 건 좀 독특하잖아요!”
라며 글을 써달라던 민우회 활동가.
하긴 노무사나 연극배우 둘 다 ‘아주’ 평범한 직업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연극을 한다고 하면 으레 “우와! 정말? 대단하다~” 뭐 이런 말들을 듣는데 그러면 왠지 부끄러워진다.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대단히 잘하고 있지도 못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대단하다는 말 뒤에 꼭 붙는 “돈은 벌어?”란 질문에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둘의 나이에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아주 오랜 친구와 남편까지도) 잘못들은 게 아닌가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혜연이가 연극을?’ 나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연극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었나? 하긴,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입시위주 교육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잘 따라가는 모범생이었다. 대학 전공은 생명공학과, 졸업 후엔 노무사 일을 했다. 책읽기를 그다지 즐겨하지도 않았고 연극을 많이 보지도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도 거의 없었고, 계절의 변화에 가슴 설레거나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거나 모임에서 재미난 얘기로 분위기를 띄운다거나…. 뭐 아무튼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부류의 인간이었다. 뭔지 모를 의무감에 선배들을 따라 시위에 나갔고, 세미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서적 몇 개를 읽었다. 언제나 옳다고 판단되는 것, 해야 하는 것을 하고자 했을 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 순간순간 내가 뭘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졸업 후, 내가 직접 노동자가 되어 투쟁하지는 못해도 주변의 지원세력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노무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내게 노무사란 옷은 갑갑하고 버거울 뿐 뭔가 뜻에 맞는 활동을 하고 있단 만족감을 느낄 순 없었다. 나는 그저 사례비를 받고 해고나 체불임금, 산업재해 등의 사건을 대리하는 노무사일 뿐이었고 노조의 투쟁에 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또 이혜연이라는 노무사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러면서도 내가 맡은 사건은 꼭 이겨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은 늘 무거웠다. 내가 지면 나 때문에 의뢰인의 인생이 크게 잘못되는 것 같았다. 사건 10개를 진행하고 있으면 10개의 바윗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 했다. 혹시나 해고 사건에서 합의라도 하게 되면―회사로부터 얼마의 돈을 받고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취하하는 것― 내가 협상을 잘못해서 적게 받은 것만 같아 괴로웠고, 지면 분하고 억울하고 내 잘못인 것 같아 죄책감에 늘 밤잠을 설쳤다. 이겨도 ‘휴~’하고 다행스런 한숨을 지을 뿐이었다. 어떤 선배 노무사가 내게 “사건에 목숨 걸지 마. 그럼 속병 나서 노무사일 못해”라고 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나는 점점 기진맥진해져갔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왜 이러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되었다. 그 무렵 엄마도 많이 편찮으셔서 노무사 일에 엄마 병간호까지 하느라 나는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빛
우습게도, 아니 당연한 건가? 그렇게 숨 막히는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내안에 뭔가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까맣게 잊고 지냈던 무엇. 내 마음 깊은 곳에 아주 조금, 수많은 생각과 의무감에 덮여,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빛이 조금씩 떠올랐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 그것은 연극이란 단어와 함께 떠올랐다. 아무도 몰랐고 나조차 거의 잊고 지냈지만 나는 늘 연극을,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내가 이 나이에 이제 시작해서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까? 소질은 있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버리는 게 아닐까?
어느 것 하나에도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이런 질문들은 어찌 보면 예의상 던지는 질문일지 모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고 때론 그래서 무식한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서른한살에 결혼을 했고 서른두살에 노무사 일을 때려치웠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노무사 일을 그만둘 수 있었을까? 결혼을 안했더라도 뭔가 결단을 내렸을 것 같긴 하지만 가장 힘든 시기에 구세주처럼 나타나 나를 설레게 하고, 나를 쉬게 해준 남편이 정말 고마웠고 지금도 너무 고맙다.
인생은 한번뿐 후회하지 마요
먼저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아를 찾아가는 연극여행’이란 워크숍을 들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극단에서 연극수업을 해주는 곳을 찾아 3개월간 발레, 화술, 장면 만들기 등의 수업을 들었고 짧은 작품으로 발표회도 했다. (그때 내 친구 역할을 했던 아이는 12살 아래, 나와 띠동갑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좀 더 제대로 배워야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서울예대 부설 남산교육원 연기과정에 등록했다. 지금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별 갈등 없이 한 것 같지만 그때는 뭐 하나 시작할 때마다 엄청 망설이고, 갈팡질팡했으며, 선택한 후에도 왠지 주눅이 들어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어렵고 그랬었다. 언젠가 내가 뭔가를 등록하러 갈 때였을 거다. 가면서도 망설이고 있었는데 버스에서 자우림 노래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한번뿐 후회하지마요~
진짜로 가지고 싶은 걸 가져요!
용감하게! 씩씩하게~
오늘의 당신을 버려봐요~’ ♪
후훗. 우습게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다짐했다. 그래, 해보자!
남산교육원은 1년 과정이었는데, 가을 학기를 듣고 나서 안산 서울예대가 학점은행제 형태로 바뀌면서 통합의 과정이 있었고 내가 듣던 교육과정은 없어져버렸다. 오 마이 갓…!
‘이 나이에 방학이 있다니! 즐겁게 겨울방학을 보내리라’ 다짐하던 나는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러자 담당 교수님은 나를, 교수님이 대표로 있는 극단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고, 그것을 계기로 나는 그 극단의 단원이 되었다. 그때가 2004년 3월, 내 나이 서른 셋. 지금은 어느덧 프로필에 여러 개의 출연작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서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울컥할 때도 있었다. 하면 할수록 어렵고, ‘내가 정말 잘 못하는 구나’를 깨닫게 되어 배우라고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조금은 뿌듯하다. 내가 과연 내 평생의 직업으로 배우를 선택한 것인가, 내가 계속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확답을 하진 못해도 어쨌든, 한다. 지금.하고.싶으니까! 재능이 뛰어나거나 열정이 끓어 넘치는 건 아니지만 ‘뭐 어때? 지금의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고 그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은 원하는 걸 찾아서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언젠가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상은이 말했다. 그렇다. 인생은 의외로 길다. 돌아갈 수도 있고 쉬었다 갈 수도 있다. 늦게 갈 수도 있고 빨리 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자기만의 인생의 길을 간다는 것 아닐까. 불안과 의심이라는 버려지지 않는 짐은 항상 지닌 채로….
이혜연 ● 지금 우리 딸은 태어난 지 19개월째다.
그리고 나는 지난 3월, 2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섰다.
딸에게 행복한 삶을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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