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12월호 [기 획 ] 스물아홉
▣ 기 획 어 쩌 면 이 건 당 신 의 이 야 기
연말에 가까울수록 나이듦에 불안하고 서툴다. 여자 나이, 서른, 마흔, 쉰. 요구되는 규범과 나다움의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여울, 또세, 생기의 서른 전 여행과 마흔 넘은 공부와 쉰이 넘어 다시 나선 길. 여기 그녀들이 겪는 <오늘>의 이야기가 있다. |
스물아홉
여울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내 나이인 저 숫자가 과연 많은 건지, 적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굳이 인지하며 살아야 하는가도 싶다. 현재 나는 혼자 서울에서 거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자 민우회 회원이고 술을 즐겨 마시는 기독교인이다. 회사원으로서 이런저런 못 볼 꼴들을 한 눈 질끔 감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찢긴 마음을 들고 민우회에 가서 치료받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를 만나기도 하고, 진탕 술을 먹고 교회에 가서 회개하는 여자사람이다.
정말 모순적인 20대를 보내고 있나 보다. 위의 과정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니, 나를 찾아 주었다
대표적으로, 스물 여섯부터 시작한 사회생활은 세상을 실감하게 하는 동시에 잠재되어 있던 화와 공격성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고, 민우회는 내가 세상과 맞설 용기를 찾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과거에는 불편한 상황에서 그냥 넘겨 버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던 나였다면 지금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 나의 욕구와 기분, 상태를 좀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된 것.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나의 가치관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불과 4~5년 사이에,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그동안의 나를 벗어 버리는 과정을 겪어 왔다.
나이가 들면서 겪는 또 하나의 변화는 진부하지만 역시나 겪게 되는 것은 주위의 ‘결혼에 대한 압박’이다. 무시할 수 있을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서른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주위의‘걱정’을 가장한 ‘압박’은 그동안 애써 찾은 나를 점점 잃게 만드는 것 같다.
이제서야 나를 찾고 삶을 알아 가는데, 세상은 나더러 다시 평범하게(?) 살기를 강요한다.
민우회를 알고, 독립을 하기 전까지 난 살아 있지 않았던 것과도 같다. 이제야 겨우내 삶을 살고 자유를 갖고 내 삶을 살고 있는데…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언가 보여줘야 인정해 줄 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똑똑하지도, 능력 있다고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용감하지도 못하다. 반찬 뚜껑을 끙끙대며 한참이나 열지 못해서 좌절감에 휩싸였던 적도 많다. 겨우 이런 것도 못하면서 ‘과연 혼자 살 수 있을까? 겁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그들의 걱정 아닌 걱정이 떠올라서 사실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언제쯤일지 모르겠으나, 1~2년 정도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볼 것이고, 미친 듯한 열정적인 연애에 빠져 사랑하고 싶다. 지금까지 날 위해 살아왔으니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도
살아 보고 싶다.
주위에서 자꾸 인지토록 강요하는 29살. 나는 나이를 인지하지 않고 살고 싶은데. 그게 편한데…
앞서 말했듯이 진부하지만 역시나 나도 겪게 되는 통증인가 보다.
항상 생각이 많을 때는 본능적으로 바다가 보고 싶다.
20대의 마지막 생일에는 더욱 그러했기에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2박3일 동안 부산의 바다를 보면서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나?’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일까?’생각해 보았다.
“많은 사람에게 내가 가진 사랑을 나누며 살자”
이것이 바다가 나에게 준 대답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미웠던 사람들, 너그럽게 대하지 못했던 사람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모두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고, 많은 사람을 사랑하자!
그래, 내가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나의 사랑이 필요한 순수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인 것 같다. 예수님이 흠 많은 나를 사랑해 주셨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강한 여자가 될 것이다. 거칠고 사나운 ‘강한 여자’가 아니라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이 들이대는 각종 잣대에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그런 ‘강한 여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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