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4월호 [민우칼럼 창] 섭섭함과 원망, 그 근원은 어디일까?
섭섭함과 원망, 그 근원은 어디일까?
정진주●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다보니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일로 웃다, 울다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인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웃을 수 있는 일로만 가득 찬다면 좋겠지만, 아니 분노하거나 짜증나는 일만 없어도 살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섭섭함과 상대에 대한 원망까지 섞이는 관계가 되면 쉽사리 그 기분이 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튈 소지를 갖고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섭섭함과 원망, 과연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일까?
한국사회에서 소위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는 결혼시기가 늦추어지고 있다. 교육기간이 과거보다 길어지고, 결혼을 필수 품목보다는 선택으로, 또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아 결혼하는 연령대가 늦추어지고 있다. 전반적인 추세가 삼포세대로 접어든 것이다. 삼포세대란 취업이 되지 않거나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연애, 결혼, 임신까지 포기한 세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들이 “너희는 왜 그렇게 금방 만나고, 금방 헤어지고 하느냐”는 질책에 대해 “삶이 이렇게 불안정한데 어떻게 사랑이나 연애가 안정적일 수 있느냐”(엄기호(2010),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고 반문한다.
불안정한 시대에 배우자의 기준도 더욱 엄격해졌다. 과거에 100원짜리가 500원짜리와 만나 600원짜리 가구를 형성하는 결혼도 했지만 이젠 100원짜리는 100원짜리와 500원짜리는 500원짜리가 짝짓기(물론 사람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를 하는 바람에 결혼으로 인한 가구소득의 편차는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사회계층이 고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혼을 계기로 또 한 번의 계층 고착화가 개입되고 정착된다. 불안정한 사회안전망 시스템에서 평생 사회보장책이 될 수도 있는 배우자와의 만남이 너무나 중요해졌다. 오죽하면 결혼정보회사에서 여성의 외모를 등급별로 매겨 각 등급에 맞는 배우자를 연봉 300만원씩 달라지게 짝짓기를 한다는 논문이 나오지 않았던가.
세상이 이렇게 변화하니 결혼한 부부들 간 갈등은 배우자를 다른 배우자와 비교하며 얼마나 자신에게 잘 해주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 능력이 주요 이슈여서 경제적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 배우자와 갈등이 생기기 쉽다. 결혼의 조건은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이며 배우자에게 기대나 의존을 하지 않는 것’(법륜(2010), 『스님의 주례사』)이라는 말이 현 세태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기대는 채워질 것을 요구하고, 채워지지 않을 경우 섭섭함과 원망을 낳는다. 그런 기대를 버리고, 함께 사는 그 사람도 이 험난한 경쟁과 신자유주의의 물결에서 가까스로 헤엄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동변상련의 심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지 않을까.
내 나이 이제 5학년에 진입하니 주변 사람들이 부모로 인해 여러 가지 고민과 고생(?)을 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지만 제대로 된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보니 치매, 만성질환, 와병 상태에 있는 늙으신 부모님의 간병문제가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늙어 가시는, 변화되는 부모님을 아직 자식들의 마음속에서 정리를 못하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런 부모님의 병환은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교육은 40세부터 나 자신을 위해서도 또 부모를 생각해서도 필요하다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모님의 병환이 심각할 때 특히 가족 중 누가 더 간병비나 생활비를 많이 대고, 누가 더 부모님께 얼굴 한 번 더 내미느냐가 주요 화제로 떠오르고 가족 간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다른 가족원이 얼마나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시비를 하지 않으면 섭섭함도 줄어 들 것이다. 가족 수가 많다면 중앙사령탑이 있어서 필요한 재원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좋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 요구하고, 그러한 대안에 참여한다면 향후 미래 세대가 경험할 가족원끼리의 원망도 줄어들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사회공헌기금이 등장하였다. 기업이 기부를 하지 않는 것보다 기부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더 나아가 올바른 기업상은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환경을 제대로 마련하는 것이 우선순위일 것이다. 기업의 사회공헌기금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데, 기금 운영을 단체에게 일임하는 것은 어떨까? 기부금조차도 성과주의에 휩쓸려, 또 가시화할 수 있는 성과물에 매달려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종종 기업의 홍보용으로 사용된다면 ‘섭섭한’ 기금이 될 수밖에 없다. 기업 측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때론 얄팍한 기대를 깨끗이 정리하고, 사회공헌기금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신명나는 기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섭섭함과 원망. 이는 상대방에 향한 나의 욕망에서 나온 기대를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상대방이 알아서 해 주면 더욱 좋은 것이고. 더 나아가 섭섭함의 근원이 사회적 안정망과 사회적 책임이 부재하여 나타난 것이라면 사람과의 관계로 이 문제를 치부하지 말고 사회적 차원, 정부 차원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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