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겨울 [기획] 5인분의 이별
이별은 여러모로 질척여야 한다. 울고불고 부여잡고 매달리고 소리 지르고 토하고 내뱉어야 한다. 쿨하고 차가운 이별, 합리적이고 냉담한 이별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애정관계에서 힘 있는 입장이거나 감정을 유보하는 것이 초라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느 일본 영화처럼 서늘한 이별보다는 서로에게 “이게 네 바닥이야?” 라는 대사와 어울리는 지긋지긋한 한국 소설의 몇 장면이 더 편할 때도 있다.
이쯤 쓰다 보니, 그렇다… 이게 이별을 못 받아들이는 찌질함의 궁극의 모습이다. 지갑을 잃어버리면 지갑 안의 내용물이 사라졌다는 것보다는 지갑이 사라진,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숨이 막힌다.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과거가 내 발목을 잡는다. 그 과거가 나인데, 거기가 내 현실이라고 믿는다. 이미 지갑은 잃어버렸으니 번뇌가 시작된다. 점점 걱정과 불안,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퍼져나간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고통 그 자체보다는 과거와 현재, 변화 사이에서 이별하지 못하는 마음의 문제로 보았다. 어쩌면 매일 이별한다. 어제의 나와, 어제의 누군가와, 어제의 칫솔과 어제의 피부와 어제의 방광과 이별한다. 모든 것이 내 손 안에서 통제되고 있다고 믿는 마음의 확신이 고통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별의 의미를 찐하게 체감할 어떤 계절이 도래했다.
이별에 대처하는 나무의 자세 - 나무의 1인분
나무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별은 연인과의 이별이었답니다. 그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어찌하지 못해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었던 적도 있었고, 차를 타고서 무작정 도로를 달리기도 했었고, 소주를 들입다 병나발을 불기도 했었답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어느 날, 차안에서 조규찬의 ‘Thank you’를 틀어놓고 펑펑 울었던 기억도 있네요. 여전히 연인과의 이별 후에는 만만치 않은 감정들이 몰려들지만, 나무에게도 나름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답니다. 이른바 ‘이별에 대처하는 나무의 자세’랄까요? 하나는 지금의 그 이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 사람과 나는 이별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감정들을 충분히 느끼되, 그 감정 속에서 허우적대며 더 크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별을 인정하지 못함으로써 하게 되는 생각과 행동들은 스스로를 더 오랫동안 그 상황에 머물게 했었고, 슬픔 혹은 고통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허우적대면서 그 슬픔과 고통을 더 처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었답니다. 사랑(사람)을 억지로 잊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 털어버릴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어떤 때에는 확 다가오고, 어떤 때에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들을 그만큼 감내하는 수밖에요. 그러다 보면 감내해야하는 슬픔과 고통의 크기는 조금은 작아질 테고, 기억은 시나브로 희미해질 테니까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 윤냥의 1인분
결국 가장 극적인 이별은 죽음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그 순간 자체가 두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좀 나이 들면서 살펴보니 문제는 과정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대략 이런 표현을 썼다. “사람들과의 이별은 훨씬 일찍 시작된다. 노쇠는 그 병약함으로 인해 삶과 다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서서히 쇠락해간다는 사실이 그 사람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대개 몸에서 시작된다. ‘노쇠’는 아직 농담이지만, 어쨌든 내 몸의 쇠함을 조금씩 느끼고, 포기하고 떨궈야 할 것들이 그만큼 생겨난다. 50대 후반의 내 아버지가 읊었던 “이쯤 되니 왠지 센치해져”라는 문장도 이제 약간은 이해할 것 같다.
그래서 삶의 덧없음과 두려움, 격리와 박탈에 맞서는 유구한 경구를 자꾸만 되뇌었다. 인생 별거 있나, 짧고 굵게, 또는 가늘고 길게,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등등. 그래봤자 한순간. 작은 영화라도 좀 보겠다고 아등바등 전전긍긍하는 게 딱히 달라지진 않는다. 체감하기 시작하는 두려움과, 언제까지나 팔팔하게 세상과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착각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상태는 오히려 더 심해진다.
이제 이 글 제목과 같은 책 이야기. 이 책은 내가 갖고 있던 것들과 차츰차츰 이별하고 궁극의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은, 그저 연령대에 따른 육체의 물리적 변화라는 걸 건조하게 이해시킨다. 동시에 그 죽음이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놓여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초연함 따위는 생기지 않지만, 나처럼 오락가락하는 사람의 마음은 조금 편해진다. 점점 가까워지는 죽음을 생각할 준비는 됐다는 얘기다.
이토록 철저한 이별 준비 - 육육의 1인분
무라카미 하루키 탓이 아니다. 나는 그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죽음을 알려주는 내내 관심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으나, 끊임없이 계속 찾아오는 밤중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결정적 이별, 죽음에 압도당하게 됐다. 아버지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고 내게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그 우주적 두려움을 달래준 것은 끈덕지게 삶에 충실한 이들의 치열한 죽음이었다. 평생의 연인이 죽은 다음해 권총 자살한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가 유서에 남긴 메모는 이러하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진짜 상관이 있건 없건 간에, 나는 그의 시크한 유서 문구가 애써 자신의 삶을 항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토니 클립튼’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변신해 ‘진짜는 무엇일까’ 질문하는 실험적인 쇼를 펼쳤던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Andy Kaufman)의 암투병과 죽음은, 여전히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여전히 평생의 꿈인 ‘진짜 가짜쇼’를 어딘가에서 펼치고 있는 것일지도. 삶의 정점에서 죽음을 맡기보다 삶을 늘 정점에서 살다가 죽음조차 생의 감각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고집은 이런 예시들로 강화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이별의 계절에 진심으로 막장 인생 속에 던져진 여러 명의 전 인생을 그린 미드 <식스 핏 언더>를 추천하고 싶다. 앉아서 맞이하는 탄생과 죽음의 순간이 우리의 2014년 생애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아주 잘 알려줄 거라 믿는다.
그 이별로부터 배운 것 - 모구의 1인분
“난 못된 년이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게 만들었던 그 이별. 나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없던, 나를 들여다볼 줄 몰랐던 스무살에 그 사람을 만났고 열심히 사랑했다. 그렇지만 나는 못되게, 정말이지 못되게 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것도 그 사람에겐 기댈 사람이 절실했던 힘든 시기에. 이별을 결정하기까지 그 시간들은 무척이나 버겁고 힘겨웠다. 그 때는 나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그 사람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별을 결정하면서 나는 그 결정을 온전히 내 몫으로만 여겼다. 그 사람은 이유를 몰랐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어떠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이별을 맞닥뜨렸기에 더 아팠을 것이다. 어렸던 나는 사랑의 시작이 그랬듯 이별도 함께 하는 거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아픈 상처를 줬지만 이미 이별해버린 이상 그 사람의 상처에 대한 치유는 내 몫이 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 이별을 겪어내며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만남과 이별을 그저 물 흐르는 듯이 애써 담담하게 흘려버리고, 어떤 시작이나 끝을 내가 먼저 결정하는 것에는 정말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결정한 후에는 뒤돌아보지 않는 게 나란 인간이었다. 이건 정말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이걸 알게 되면서, 다음 이별에는 나도 상대방도 덜 아프도록 함께 이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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