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겨울 [문화산책]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씩이나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
[문화산책]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씩이나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
데이지
회원
*웹툰 미생은 누적 조회수 6억 건을 넘겼다. 미생(未生)은 말 그대로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돌’을 의미하며 바둑용어이다. 바둑에서 집을 짓지 못한 돌을 가리킨다. 바둑 입단에 실패한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에 입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건 일이야.”
노동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한마디에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있음을 안다. 가령 이런 것.
1. 너무 애쓰거나 감정을 투여하지 말 것. 어차피, 그래봤자, 그나저나 등의 부사와 함께 쓰임(활용 예시1, ‘어차피 일인데 너무 맘 쓰지 말자.’)
2.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관계이므로 긴장, 목표의식, 계획 등이 요구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의 부사와 쓰임 (활용 예시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니까 긴장하자.’)
두 가지 의미는 갈등적으로 보이나 노동이란 두 글자에 기대어 살고 있는 생활 세계 안에서는 꽤 현실적인 문장이다. 또한 <미생>에서의 각 인물들의 갈등과 분열, 고민과 일상을 녹여내는 주제의식과도 닿아있다. <미생>은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의 인턴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을 배경으로 노동이 가진 본래적인 의미와 성취, 갈등과 의미를 탐구한다. 그 속에서 일에 ‘의미부여’하고 매달렸던 사람들을 다룬다. 웹툰 1부의 마지막은 오과장이 장그래를 데리고 쌍용자동차노조의 거리분향소를 찾는 장면이었다.
노동과 ‘복기’
10월 내내 미생 얘기만 하니 오죽하면 팀 회의 때 “기승전미생이야”라는 말까지 들었다. 빨리 보면 허전하고 아까울 것 같아 아껴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내 모종의 피로를 느끼기도 했다. ‘아. 나만의 고민이 아니구나’란 생각과 더불어 ‘만화를 보면서 일 생각이 나니까 힘들다’는 마음 말이다.
윤태호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바둑과 노동의 관련성을 바둑의 ‘복기’라는 과정에서 찾았다고 한다. 바둑은 승패가 끝내고 꼭 이긴 자가 진 자가 왜 졌는지를 복기시키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노동의 과정에서도 승패라는 프레임으로 보기 어려운 일상적인 ‘복기’의 과정이 있다. 일을 배우는 시기, 선배를 만나는 시기, 후배를 만나는 시기, 그리고 어느새 나를 만나는 시기… 일상적으로 귀가 길에 찾아오는 후회, 성찰, 반성, 억울함, 분노와 일요일이면 젖어드는 두려움, 다짐, 낯섦 같은 감정의 고리들이 바둑의 복기 과정과 어떻게 닿아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향은 곧 길이고,
그 길을 걸을 뿐인 누군가는
길의 끝에서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에서 소박하게 만족한 미소를 띤 누군가가 서 있을 수도,
괴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216p, <미생> 8권
여성 노동자를 그리다
장그래의 동료 인턴인 비범하고 천재적인(!) 안영이 캐릭터나 육아와 남편과 일 사이에서 고군분투 하는 선차장, 항상 웃는 표정으로 상대의 수에 흔들리지 않는 부장 등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생>은 여타의 만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성 캐릭터를 ‘게으르게’ 그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만화 속 여성이 주인공을 보조하거나 수동적이고 도구화되는 반면 <미생>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은 꽤 현실적이다(성희롱예방교육 장면도 있다).
작가 주변 남성들이 ‘안영이’ 캐릭터를 가장 싫어 한다는 말을 건네니, 직장 생활 중인 여동생이 “그거 남자들 열등감 때문이야”라고 일갈한다. 동생은 안영이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직장 생활 다녀보면 소위, “여자가 훨씬 이성적이고 똑똑한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렸을 때부터 박탈감과 열등감이 자신을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말한 작가의 인터뷰를 보며 사람에 대한 통찰의 시작이 어디부터였는지 느껴졌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결국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연대하고 연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힘이기도 한 것이다.
미생을 완독하고 완생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은 걸까. 미생의 마지막회 대사처럼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 씩이나 하려고 했던” 무수한 사람들.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순간 허탈하고 뭉클해졌다면 실마리 정도는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