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겨울 [나의 노동이야기] 예술로 돈 벌기, 예술가로 살아내기
[나의 노동이야기]
예술로 돈 벌기, 예술가로 살아내기
최혜영(혜영)
회원
나의 노동에 공감해주길 바라며
나는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양한 창작활동에 관심이 많다. 그것으로 돈도 벌고 놀기도 하고 관계도 맺고 활동을 넓히고 때로는 끊어나가며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이런 나를 소개할 때에 예술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무언가 서로 어색하고 불편해 하는 기색이 느껴져 그 말을 아낀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술’에서 그 입지와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인식을 확인하며 스스로에게 예술의 정체를 묻기도 한다. 예술계에서 지금까지 활동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려니, 어째 즐겁고 좋은 이야기보다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불편하고 부당한 경험들이 왜 나의 동력이 되었는지를 나열하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내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나의 노동에 의미를 묻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금도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 일인지 함께 공감해주길 바라며 글을 써나간다.
너무나 부당했던 그 경험들
혼자서 익히던 사진에서 부족함을 느껴 학교공부를 통해 사진의 전문성을 쌓아가는 과정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후회 없이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나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졸업시즌에 진로상담을 하면서 수업 시간과 과제 수행에 소홀했던, 내가 보기엔 그저 힘만 좋았던 남자 동기생들이 교수님들의 호출을 받고 하나 둘 스튜디오로 취업이 되는 걸 지켜보며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사진계에서 진취적으로 활동을 해나가려던 꿈은 당구장 죽돌이들에게 어김없이 내어줘야 했다. 이것이 내가 느낀 첫 번 째 부당함. 그 경험을 통해 남성들이 대부분인 사진계에 여성사진가들이 발을 들여놓고 활동을 넓혀가기란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후에도 그 쪽으로 취업한 친구들이 노동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주말․휴일, 야근할 것 없이 적은 월급으로 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도저히 그 쪽으로 발을 들여 놓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사진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 기회가 생긴 것이 미술관. 좀 더 폭 넓게 예술계를 조망하고 창작자들을 만나 나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일하기 위해선 적당히 순종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괜찮은’ 학교 출신, 어느 정도의 외모 가꾸기가 따라주어야 수월한 직장생활이 가능했다. 여기에 뭐 하나 따라주지 않는 나로선 끈질긴 버티기와 좋은 성격으로 대신해야 했는데 이조차 되지 않아 직장생활에서 ‘나의 소신’이란 것은 늘 질문이 달려야만 했다. 청바지를 입으면 예의를 갖추지 않은 깡패 코스프레로 지적을 받았다. 주말근무를 한 이후 평일 휴무를 갖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 되었다. (대부분 여성들로 이뤄진 미술관에서)남자직원을 기다리지 않고 정수기 물을 채우거나 목소리가 큰 것은 동료들을 위협하는 행위였고, 팀장님 눈치를 살피지 않거나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건 치명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나는 찍힐 대로 찍힌, 이상하고 말 안 듣는 직원이었던 거다. 그리고 예술로 돈을 버는 상업공간인 미술관은 스스로 벽을 높이고 일부만을 위하는 향유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것이 사람들이 어려워하며 불편해 하는 예술의 이면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계기. 그리고 나의 두 번 째 부당한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내게 있어서 예술은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기를 바람으로써 그 현장이 어디인지, 나의 역할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찾았던 것 같다. 그 시작이 장애여성공감에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의 사진전에 전시기획으로 결합했던 경험이었다. 부족한 소통과 경험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기대해 준 사람들과 예술로 결합하고 의미를 확장하고 즐거움을 찾는 성과는 이후 나의 활동 지향에 있어서 여러 번 곱씹으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사진을 찍는다. 방향을 찾고 있고 소심하게 의미를 물으며 게으름을 합리화하려는 체력을 탓하면서. 최근에 느끼는 부당함을 ‘고백’하자면, 디지털화된 이미지시대에 흔하디흔한 것이 사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에게 나의 사진작업물이란 것이 자신을 꾸미기 위해 사용권을 묻지 않고 쉽사리 이용되거나 공적 취지로서의 재능기부를 요구받기 일쑤라는 것. 이 현상을 많이 고민하고는, 얼마 전부터 최소한의 ‘예술가의 권리’를 조심스럽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개 사용권을 묻거나 기부 의뢰를 하는 곳은 곤궁한 사정을 고려하기 충분하므로 ‘같은 사정에 놓인 나의 가난을 함께 이해해 주겠지’라는 기대감을 갖고 이 내용을 전하지만 결과는 때때로 석연치 않은 반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 때 함께 하고자 했던 의지는 공적취지를 이해 못한 이기적인 예술가가 되어 기회를 잃고 관계가 소원해져 그대로 기운을 잃는다. 지금도 아쉬움이 크게 남는 몇몇 건이 머리를 맴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예술가의 권리’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다.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는 있다는 믿음이 여러 영역에서 쓰이기는 참으로 쉽지만 어째 예술가들의 노동은 여전히 거론되지 않고 소외된 영역에 놓여있는지 모르겠다. 헝그리정신의 치열함으로 예술이 탄생한다는 풍토가 이제는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용기가 필요한 나의 권리 주장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치열함은 예술과 예술가를 보호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나의 노동권이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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