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민우ing] 좋은 집을 지읍시다
[민우ing]
좋은 집을 지읍시다
권박미숙(먼지)| 여는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1000에 35로 서울 시티 지하 투어
민우회원 B는 서른을 맞아 독립을 결심했다. 비혼으로 독립하겠다고 나서는 딸에게 부모님은 원조 없음을 선언하셨고, B 역시 자기 힘으로 독립하기를 원했다. 틈틈이 모은 보증금은 1000만원, 월세도 35만원까지 각오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나마 시세가 싸다는 은평구의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의 첫마디는 이랬다. ‘아가씨, 반지하랑 옥탑, 둘 중에 어느 쪽으로 알아볼래요?’
추위에 약한 B는 반 지하를 선택했다. 그리고 시작된 은평구 지하 투어. 낮에도 어둑한 집안, 공기에 배여 있는 눅눅함, 어김없이 번식중인 곰팡이의 대행진을 보며 정녕 지하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해야하나 고민이 많았다. 가끔 부동산에서 지상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반 지하 집들은 방 2칸에 작은 부엌이 딸린 구조였는데, 겨우 반 층 지상으로 올라가자 방은 1 칸으로 줄었다. ‘혼자 사니까 뭐’라며 기운을 내보았지만 현관을 열자 등장한 사다리꼴 모양의 집에 다시 좌절. 그 후 마름모꼴 집, 삼각형 집, 1층인데 방문을 열면 바로 길거리인 집, 건물 주차장에 벽을 쳐서 방으로 개조한 집 등 건축 기법의 한계를 뛰어 넘는 각종 집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상에 터무니없는 집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리고 그 중 한 집이 내 집이 될 줄이야.
결국 문제는 돈이라서
그래도 행운의 여신이 B의 독립을 축하하는지, 운 좋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집이 등장했다. 3층 연립주택에 3층, 방 하나에 부엌 겸 마루가 있고 부엌 옆에는 창고로 쓸 수 있는 보일러실까지 딸린 네모반듯한 집이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꺼져 있긴 했지만 그나마 이게 어딘가. 만세를 외치며 득달같이 계약 성사! 그러나 그 집의 겨
울은 혹독했다.
오래된 집이라 단열이 거의 되지 않았다. 벽이 있지만 매서운 바깥바람을 집 안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보일러를 켜도 가스비만 올라갈 뿐 집은 절대 따뜻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 보일러를 켜기만 하면 단열재 없는 벽에 결로가 생겨 곰팡이가 스멀스멀 번식을 시작했다. 이를 덜덜 떨며 자다가 이불에 하이킥을 하던 밤, B는 생각했다. 이런 집을 사람이 살라고 세를 놓다니, 심지어 한 달에 35만원이나 받고! B는 집주인에게 말해 보았다. “어르신... 집이 너무 추워요...” 마음속으로 월세 협상을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 “추워야 건강하제~ 북한이랑 전쟁나면 우리가 절대 못 이기는 이유가 뭔지 알아? 북한이 춥거든! 그래서 체력이 엄청 좋은 거라!”
결국 문제는 돈인가, 어쩐지 먼 곳을 응시하게 된다. 그러게 왜 부모님 집 두고 나와사서 고생인가, 후회를 할까 말까 눈가가 촉촉해진다. B뿐만이 아니다. 저소득 세입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반지하 침수의 서러움, 집주인과의 신경전, 곰팡이와의 전쟁, 모진 외풍을 버텨낸 혹한기, 억울하게 돈 떼인 사연이 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영어 공부해서 돈 더 주는 직장을 잡아야지, 더러워도 꾹 참고 이 직장에서 버텨야지, 결혼을 해야지, 부모님이 한 밑천 떼 주시진 않을까? 로또라도 됐으면.
세상의 모든 B씨들을 위한 집
집은 단지 집 문제로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자세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단지 돈 문제로 놔두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복잡한 걱정과 불안을 떨치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만 생각해 보자. 그건 바로 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의 나이, 가족 상황, 결혼 유무, 경제력 여부와 상관없이 집은 필요하다. 물론 그 집은 겨울에도 포근하게 잠들 수 있고, 장마철에도 물에 잠기지 않으며, 집주인과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터진 수도는 당연히 수리되는 그런 집이어야 한다.
그런 집이 돈을 더 버는 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생길 수있을까? 몇 가지 새로운 제도를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최저주거기준 현실화’ 같은 것. 주택법 제5조 2,3항에는 ‘국민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저주거기준이 명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최소 주거면적, 필수적인 설비의 기준, 안전성과 쾌적성 확보 기준’ *같은 것이 쓰여 있다. 다만 아주 애매모호하게 쓰여 있고, 벌칙 조항이 딱히 없어 안 지켜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최저주거기준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항으로 바꾸고, 실제로 건물을 지을 때 꼼꼼히 적용하게 한다면 어떨까? 1000에 35로 집을 구해도 B씨가 살 수 있는 집들이 그렇게까지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임대차 계약 관련 제도를 정비하면 세입자도 ‘을’이 아닐 수 있다. 지금은 집수리에서 임대료 인상까지, 모든 것이 집주인 마음에 달려있다. 고장이 생겨도 세입자의 관리 소홀을 탓하면 억울하지만 당장 살기 불편하니 내가 고칠 수밖에 없다. 임대료인상도 마찬가지,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재계약시 전임대료의 5% 이상은 인상할 수 없지만, 싫다고 하면 집주인은 재계약을 거부하고 다른 세입자를 찾으면 그만이다. 집수리에 대해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의 권리와 의무가 명시된 표준임대차계약서** 가 통용된다면, 집수리 문제는 갑을관계가 아닌 법적 의무와권리의 장에서 해결 가능할 것이다. 또 같은 세입자와 재계약 할 때만 임대료 인상률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세입자가 바뀌어도 전 임대료의 몇 % 이상은 올릴 수 없게 제도를 정비하면 오른 집세 때문에 억울한 이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입자의 정치를 시작하자
‘돈 없는 세입자도 맘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들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민우회 성평등복지팀에서는 2014년 한 해 동안 그런 집을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흩어져 있는 세입자들의 서럽고도 소중한 집 이야기를 모아 정치적인 힘으로 키우려고 한다. 모여서 서럽던 지난날도 나누고, 세입자로 살다보면 꼭 필요한 집 보는 노하우와 집주인 대처법도 나누고, 그러다 보면 무슨 제도가 생겼으면 좋겠다거나 무슨 제도는 꼭 바꾸고 싶기도 할 것이다. 4~6월에는 비혼여성 세입자들의 주거 경험을 발굴하는 ‘나의 집이야기’ 인터뷰를 진행했고, 곧 민우회 블로그를 통해 연재된다. 하반기에는 ‘세입자 주거권 액션단’도 활약한다. 액션단은 세입자 주거권 가이드북 「HOUSE & PEACE」제작, 주거 복지 관련 강의 기획 등 널리 세입자를 이롭게 하고 주거권을 드높이는 활동을 할 예정이다.
*국토해양부 공고 제2011 - 490호
**일례로 서울시는 보도자료(2014. 3. 19)를 통해 ‘현재 통용되는 임대차계약서에 주택 수선 유지관련 내용이 아예 빠져있어 임차물의 사용 수리 등과 관련, 세입자와 집주인 책임범위가 불명확해 많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임대 임차인간 권리 의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서울형 전월세 표준계약서’를 시범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시도가 보편화되기를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그런데 왜 콕 찍어 비혼여성 세입자?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비혼여성은 결혼하면 그래도 있을지도 모르는 신혼집 가족지원도 없고, 같은 연령대의 남성에 비해 임금 수준이 낮은 경우가 많고, 집주인과의 갑을 관계 안에서도 ‘사모님’이나 ‘사장님’에 비해 불리한 ‘아가씨’이다. 그러니까 이들 중에는 한국 주거 복지 제도의 척박함을 온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 많지 않을까. 또 이런 비혼여성이 집 걱정이 없을 만큼 세입자의 주거권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누구나 집 걱정 없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집이 단지 복지가 아닌 성평등복지여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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