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기획4] 우리는 ‘집단 기억의 힘’을 경험하는 광장에 다시 한 번 서 있다
[기획4]
우리는 ‘집단 기억의 힘’을 경험하는 광장에 다시 한 번 서 있다
이소희(바람)| 여는 민우회 회원
1
어렸을 때 풀이름, 나무이름을 물으면 엄마는 말해주었다. “향이 좋은 이 나무는 라일락이야. 저 분홍빛 꽃나무는 백일홍이야. 이것은 감자고, 저것은 토란이야.” 엄마가 일러준 풀이름, 나무이름은 신기하게도 기억 저장소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라일락 향이 나면 곁에 있는 이와 함께 라일락 나무를 찾았고, 분홍의 잔 꽃이 핀 나무 이름을 곁에 있는 이에게 알려주었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내 안에 담기는 것들이 있다.
2
신입생이던 시절 봄날이었다. 검은 천이 행정관 건물 전체를 덮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 하얀색 국화를 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추모식이었다. 목련과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이 봄날에 누가 왜 죽었을까. 92학번 선배가 등록금 투쟁과 대선자금 공개 요구 운동을 하다가 단식농성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새내기 시절, 치솟는 등록금을 막기 위해 싸우다가 사람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선배가 세상을 떠난 후 IMF 경제위기가 왔다. 그리고 10여년이 넘게 흘렀다. 대학등록금은 매해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대학생들은 800여만의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닌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졸업 후 벌이의 상당 비율은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삶이 빠듯하다.
3
고등학생 시절 대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직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달랐다. 사회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이라는 것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불안정한 일자리뿐이었다. 평생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이들은 공무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강사의 얼굴이 기둥에 가려 텔레비전을 화면을 보며 수업을 들었다. 곁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독서실의 작은 소음에 신경질을 내며, 학원가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모든 것이 재미없었다. 무채색이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그 시절 전후부터 ‘평생직장’은 보편의 개념이 아니라 특정 직업에 국한되는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직업이 되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한 사람이 떠오른다. 2003년 10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공중 크레인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탄압과 손해배상, 가압류를 겪던 노동자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가 가을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차별을 이야기하였다. 이랜드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KTX 승무원 외주화를 막기 위해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차별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을 막을 수 있는 비정규직 법안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의 실상은 비정규직 자체를 합법화하면서 불안정한 일자리 양산을 당연하게 만드는 법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비정규직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광장에는 대자보가 붙었고, 사람들은 국회로 모였다. 하지만 결국 2006년 겨울 비정규직 관련 법안은 국회 본회를 통과
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달라졌다.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차별이 부당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나보다 체념하게 되었다.
4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여름밤이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다. 엄마는 서랍에서 초를 꺼냈다. 어둠 속 노란 불빛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는 새해가 되면 밥공기에 쌀을 담고 그곳에 초를 꽂아 밤새 부엌에 불을 밝혔다. 할머니는 부엌 신에게 올 한해도 잘 부탁한다는 뜻에서 촛불을 키고 음식을 차린다고 하였다. 부엌 신이 정말 와서 음식을 먹을까 궁금한 마음에 촛불 곁을 지키고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가 ‘촛불’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하지만 이제 ‘촛불’하면 다른 것들부터 떠오른다. 광장이 생각난다.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소녀가 생각나고, 탄핵되었던 대통령이 생각나고, 광우병에 걸린 미국산 소를 먹을 수 없다고 외쳤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 “잊지 않겠습니다.” 말하며 초를 든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제 ‘촛불’은
망각하지 않기 위한 사람들의 약속의 징표인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접하면서 한동안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계속 울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고 싶었다. 또 한동안은 일부러 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출근길 연신내 어느 가게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고 한 송이 국화꽃이 그려져 있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이 가슴을 쳤다. 잊지 않겠다는 것은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개인의 기억 저장소에 자연스럽게 저장 된 기억은 잔잔한 추억으로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단순히 추억하는 것과 달리 “기억하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기억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기억은 ‘삶의 방향’을 그리고 ‘행동’하는 존재가 될 수 있게끔 하는 ‘힘’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우리는 거쳐 온 시간을 정의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난 선배를 대학의 민주주의를 위해 , 대학의 서열화와 시장화를 막기 위해 활동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어 무력함을 맞이하더라도 저항했던 목소리들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저항하기 위한 힘을 끌어 모은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과거가 현재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일이 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우리는 2014년의 봄날을 어떻게 ‘정의’하게될까? 당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그 당시를 함께 경험한 이들이 몫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집단 기억의 힘’을 경험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광장에 다시 한번 서있다.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싸움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 속 구절을 조용히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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