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문화산책] 영화 <한공주>: 공주의 시간에 들어가 보기
[문화산책]
영화 <한공주>: 공주의 시간에 들어가 보기
신필규(스머프) | 여는 민우회 회원
* 민우블로그 womenlink1987.tistory.com 에 공동게재된 글 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기간 병원에 머문 일이 있다. 딱히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긴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부침을 겪은 일로 그러했다. 사람들은 잊고 나아가길 원했고, 나 또한 그랬다. 퇴원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그 때의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지만, 문득 병원에서의 시간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끔 병원을 찾을 때, 싸한 약품 냄새를 맡을 때, 가운 입은 사람들을 볼 때,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그 때의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깨진 향수병 사이로 향이 범람하듯, 과거의 시간이 현재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어떤 일은 그렇다. 사람이 사는 시간을 다르게 만들고, 공간의 의미를 뒤바꿔 놓는다.
그런 시간을 지낼 무렵,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다가와 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억한 심정이 들 때가 있곤 했다. 가령 누군가 나에게 ‘다 이해한다.’, ‘다 알고 있다.’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괜찮으니 이제는 털고 나갈 때라는 말을 할 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대체 뭘 이해했다는 걸까.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걸까.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내왔는지 알면 모두 다 아는 걸까. 저 사람은 내가 싸한 알콜 냄새, 흰 옷, 구름 낀 날씨를 보면 뭘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사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는 일. 영화 속의 공주도 그런 일을 겪는다. 다만 공주의 경우 그 일이 일상적인 부침의 수준을 넘어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공주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다. 그리고 그 경험은 공주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그녀에겐 ‘사실’이라는 단어도, 고장 난 선풍기도, 깜빡이는 전등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주의 시간 속으로 과거를 호출한다. 영화 내내 공주의 친구 화옥이 유령처럼 그녀 주변을 배회하듯, 공주의 시간 속엔 과거의 시간이 배회한다.
2시간 가까운 영화에서 공주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부재한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히 공주의시선을 따른다. 화옥도 공주의 과거도 그녀가 현실에 특정 상황, 장소, 물건을 마주할 때 등장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사건 이 후 공주에게 세상은 어떻게 다가오며, 그로인해 어떻게 그녀의 일상 속으로 과거가 밀려오는 가를 보여준다. 즉, 영화는 공주의 시간을 재현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공주의 자리에 서서 그 시간들을 체험해보는 일에 가
깝다. 그런데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우린 공주를 알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공주를 손쉽게 갈무리하고, 분노 혹은 연민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공주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주를 연민해달라고, 혹은 공주를 위해 분노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밀착된 카메라와 공주처럼, 관객과 공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공주를 연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연민은 안전한 감정이다. 연민하는 나와 대상의 거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영화에는 애초부터 그런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고집스레 관객들을 공주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난 주변이들 중, ‘공주는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외로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는 반응들. 나 또한 그랬다. <한공주>는 기억으로도 남지만 무엇보다 감각으로, 감정으로 남는 영화다. 그리고 이것이 생생한 만큼, 내게 공주는 한 명의 생생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생존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우리의 역할을 낭만화하려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공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소외감과 외로움을 크게 느꼈다면, 그만큼 실제의 우리는 공주와 같은 이들에게 벽이 있는 사람이 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허우적거리길 반복하다 물살을 헤치고 가는 공주는 결국 혼자다. 드넓은 강 위의 점 하나, 그렇게 공주는 혼자의 힘으로 물길을 열어나간다. 하지만 그 장면 위로 공주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마치 합창처럼, 공주를 응원하고 기뻐하는 함성들. 영화의 시작, 공주에게 음악은 종교 같은 거냐는 질문에 공주는 답한다. 그렇다고, 힘은 되지만 현실에는 없노라고. 이런 점에서 첫장면의 대사와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연결지점을 가진다. 프레임 속에 사람들은 없지만, 음악처럼 소리로서 이들은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견고한 시간의
벽을 뚫고, 공주의 현실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무수한 목소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크고 밝게 응원하고 싶다.
공주를, 그리고 또 다른 공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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