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소중한 이야기
그녀는 그림으로 생각합니다. 공간지각력과 시각화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저는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그녀가 부러워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머리에 3차원 그래픽 프로그램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오오(사실 그녀는 그 프로그램보다 자신의 머리가 낫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대신 그녀에게는 제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피장파장으로 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라는 인간은 어찌나 간사한지 제가 가진 건 생각 않고 남이 가진 것만 겁나게 부러워했더랍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더니 웬걸, 아직도 모자랍니다.
흠흠, 그런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움보다 먼저 저를 때렸던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언어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라고, 저도 어렴풋이 생각은 했더랍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사람은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물었더라면, "언어"라고 먼저 답한 뒤에, "하긴, 뭐든 안 되겠어?"라고 말할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이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깨달은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실제로' 언어가 아닌 다른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의 앎과 삶이 어긋났던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요, 지은이도 그랬다는 거예요.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신의 시각적 사고와 남들의 언어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 깨달은 건 불과 3년여 전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지은이의 고백은 제 중학교(고등학교?) 때의 베스트셀러,『천국에는 새가 없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책에서 '정신이상' 행동을 보이던 아이는 결국 '난독증'으로 밝혀집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이는 대답하지요. "남들도 그런 줄 알았어요."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은데, 교조적인 말만 늘어놓게 될 것 같아 생략하렵니다. 근데 딴소리 하는 김에 여기서 말할래요. 지은이 템플 그랜딘은 자폐인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자폐인의 내면세계에 관한 모든 것"이에요. 어딘가에 쓰고 싶었지만, 중간에 끼워 넣을 재주가 없더라고요, 흐흐.)
하지만 세상에 나와 똑같은 존재는 없듯 완벽하게 다른 존재도 없는 법. 그녀와 제가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지은이가 설명하는 자폐의 여러 증세를 따라가다 발견한 것이 바로 저였다면, 믿으실는지요. 물론 저는 지은이처럼 옷의 봉제선마저 아파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촉감을 비롯한 오감이 예민한 편이어서 작은 소음도 참기 힘들어하고 살갗에 뭔가가 스치기만 해도 남들보다 훨씬 아파하거든요.
논리가 아닌 연상으로 사고하는 건 더욱 익숙합니다. 지은이가 예로 들고 있는 테드를 볼까요. "난 비행기가 무섭지 않아. 그래서 비행기가 그렇게 높이 나는 거야(25-6쪽)." 저도 가끔 (내 사랑 오이는 좀 더 자주) 제 머리에서만 연결되는 생각을 입 밖에 내서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할 때가 있지요. 테드와 제가 다른 점이라면, 그는 저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고 저는 '정신 차리고' 말할 때는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몇몇 자폐 증상들은, 일상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저의 특성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정도'의 차이로 자폐인과 비자폐인을 구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렇다면 잘 모르긴 해도, 언젠가 자폐가 '장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 내지는 '좀 더 예민한 사람' 등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경험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른 많은 사례와 참고문헌을 통해 자폐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입니다. 하지만 템플 그랜딘이 제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은 '자폐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지은이는 책 앞부분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폐아'라는 말은 있어도 '자폐인'이라는 말은 없다고요. '자폐'는 늘 '아이'라는 듯이. 성장을 멈췄다는 듯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열여덟, 열아홉, 또는 스무 살이 넘어도 자폐인은 '자폐아'로 불리지요. 자폐를 '모자람'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생각하려면 이 '자폐인'이라는 말부터 입에 붙여야겠어요.
그러나 역시나 몇 가지 걸리는 점은 있어요. 하나. 이 책에는 '정상'이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자주 등장합니다. 원어는 normal이었을 텐데요, 물론 이를 직역하면 '정상'이 되겠지요. 하지만 똑같은 단어인 homosexual을 어떤 이는 '동성애자'라고 번역하고 어떤 이는 '동성연애자'라고 번역합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비록 원저자가 normal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더라도 '비장애'나 '비자폐'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다른 책도 아니고 '장애'의 '비정상'이 아닌 '장애'의 '다름'에 관한 책이잖습니까. 아니면 '정상'처럼 작은따옴표를 붙이던가요. 최소한 '그대로' 번역한다 하더라도 한 마디쯤 짚고 넘어가는 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어권에서는 normal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의 쓰임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지은이도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그런데 과연 지은이가 이 글을 읽을 수나 있을지? 하하).
둘.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무척 힘들었다. 정육 공장 설비 설계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 차에 황소 고환을 달았고, '역겨운' 시찰을 계속해서 나가야 했다. 애리조나 주립대 안의 목장에서 일할 때는 여자 화장실이 없어 남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어떤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세 차례나 피 웅덩이로 데려갔다. 세 번째로 피 웅덩이 위를 걷게 되었을 때 나는 발을 굴러서 공장 관리자에게 온통 피를 튀겼다. 그는 내가 설비를 가동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희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136쪽)."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힘들었음을 얘기해주는 것까지는 좋은데요,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니요. 성희롱이나 성폭력의 '정도'를 어떻게 가르지요? 합의 없이 남성의 페니스를 여성의 질에 넣는 것은 '극악한' 폭력이고, '거칠게 가슴을 더듬는' 행위는 '경미한' 폭력입니까? 그랬다면 작년이던가요, 성폭력(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석방 심사 교도관이 가슴과 엉덩이를 만졌다고 하죠) 후유증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결국 저 세상으로 가 버린 서울구치소의 여성재소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죽을 마음을 먹은 걸까요? 가해(자)의 관점이 아니라면 어떻게 성폭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폭력뿐 아니라 자폐인을 고기능과 저기능으로 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은이는 '자폐의 연속체' 개념을 사용하여, 한쪽 끝에는 감각 처리 장애 또 한쪽 끝에는 인지장애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전자를 고기능 자폐, 후자를 저기능 자폐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자폐인 사회를 중심으로 한 구분일 뿐입니다. '연속체'라는 개념은 훌륭하지만, 그에 따라 '기능'을 나누기보다는 내 옆의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에 집중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뒤로 가면서 약간 지루해지기는 하지만(반복되는 디테일이 있어요), 전체적으로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양자물리학과 종교를 연결시켜 나름의 신(神)념을 세울 수 있겠어요.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논의를 좇다보면, 자폐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녀는 이렇게 말할 밖에요.
"손가락을 딱 튕기면 자폐인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자폐증은 제 존재의 일부니까요(12쪽)."
아아, 그녀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군요. 부럽습니다(아앗, 수련! >.<)
자폐인들은 자녀를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자폐인 비율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지은이는 여기서, 일정 비율의 자폐인(의 능력)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냅니다. 그녀의 말대로 자폐인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각화 능력이나 기억력, 예술적 능력 등은 소중한 것입니다(지은이에 따르면, 아인슈타인도 약한 자폐증을 갖고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그런 능력은 '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없는 자폐인들도 많잖아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에 '차이'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장애인 중심의 이 사회에서, 자폐인은 그 존재 자체로 축복일지도요.
(*) 이처럼 앎과 삶이 어긋나는 경우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점차 많은 사람들이 "나는 동성애를 '인정'해."라거나 "나는 동성애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지만, 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주위 사람들에게 "결혼 안 하니?" "(여성에게) '남자'친구 있니?"라고 묻는 걸까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템플 그랜딘과 달리 '언어'로 사고하죠.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적 언어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관(생각)입니다(이와 별개로, 위에서 예로 든 두 문장은 그 자체로도 문제적입니다. '인정'은 자신을 중심에 놓았을 때만 쓸 수 있는 단어죠. '편견이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편견이 있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정말 '편견'이 없는 사람은 편견이 없다는 말 같은 건 안 하지 않습니까).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먼지가 다 읽거들랑 갖고 가세용 ^^
엇 나 읽고 싶어요!!
글고 글 재밌어요!!
엄;;; 다시 보니(사실 안 봄. 길이만 봄) 무지 길고;;; 또 민망하고;;; 글쿤요;;; 그럼에도 공감해 주신 분들이 놀랍다는... (.. )( '')
저 서평은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약간 손본 것인데, 몇 달 전 여러 가지 이유로 삭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 저 책 읽고 싶은 분은 저한테 요청을 ^^;
끄덕끄덕~ 복잡하고 다소 어려운 내용인 것 같은데 따우의 글이 전하는 바가 와닿습니다.
따우의 섬세한 감수성에 끄덕끄덕^^
나도 그때그때 자신에게 놀랄때가 있어요. 구닥따리 사고방식을 가진 나에게...
인간은 늘 배우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지요.
갈길이 먼 여성주의 세상... 즐거이 참여할 수 있음 더 좋을텐데... 아자!!!
나도 난독증인가봐요.. 글이 좀 길어지면 잘 안읽혀요..ㅜ.ㅜ 시간 잡고 천천히 읽어봐야겠당.... ^^;;
자폐아..그렇구나..
참 공감이 가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