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회원 이야기_그 어느 때보다 지금, 미디어에 페미니즘을!
회원 이야기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미디어에 페미니즘을!
이진영 | 여는 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모니터링팀 회원
‘가정에도 페미니즘을!’ 외치며 세 남자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4월은 한미FTA가 타결되면서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자본 역시 국내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시기였다. 군소 프로그램 제작업체는 물론, CJ나 온미디어 계열의 대형 미디어 업체들도 밀려오는 거대 미디어자본과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 결과가 프로그램의 내용과 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는데, 국내 미디어 업체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 다투어 자극적이고 질 낮은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2007년부터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미디어운동본부는 자체제작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이달의 나쁜 프로그램〉을 선정하는 운동을 진행했다. 미디어운동본부 모니터링팀 활동을 이어오던 나는 이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선정된 프로그램들은 포맷이나 기획의 문제뿐만 아니라 선정적인 내용, 자극적인 영상, 특히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거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왜곡하는 부분이 많았다.
나쁜 프로그램을 선정하기 위해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와서 회의가 열리는 날은 서로 앞 다투어 모니터링한 프로그램의 문제에 대해 성토하기 바빴다. ‘남성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여성의 노출 기준’을 실험으로 규명하겠다는 미명하에 성희롱이 난무했던 프로그램, YTNStar 〈무조건 기준, 그 속이 알고 싶다〉. 성폭력 피해자가 저항하며 발버둥 치는 상황을 자극적이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묘사하며 여과 없이 내보냈던 E-채널 〈블라인드 스토리 주홍 글씨〉 등등. 미디어 자본의 시청률 경쟁 앞에서 여성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성적으로 소비되는 몸으로 그려질 지금처럼 방송 다시보기 서비스가 잘 되어있지 않던 시기라, 모니터링을 하려면 방송시간에 맞추어 일일이 비디오 녹화를 해야 하는 물리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방송 모니터를 하면서 나를 괴롭힌 것은 영혼에 스크래치가 날 것 같은 문제적 장면들을 자세히 보고, 돌려보고, 대사를 받아 적기 위해 멈춰가며 돌려 봐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백만장자의 쇼핑백-네이키드 스시 편〉(2008) 방송 화면
〈무조건 기준, 그 속이 알고 싶다〉(2007) 방송 화면
〈이 달의 나쁜 프로그램〉 선정 운동은 성인지적 관점에서 자체제작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한 최초의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차별적인 프로그램 제작자들로부터 시청자 사과를 받아 내거나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직접적인 성과를 낳기도 했다. 〈무조건 기준, 그 속이 알고 싶다〉는 결국 폐지되었고, 대한민국 1% 상류층의 문화를 보여주겠다며 여성의 알몸 위에 초밥을 올려놓고 먹는 장면을 방송했던 ETN의 〈백만장자의 쇼핑백-네이키드 스시 편〉,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 남성을 오히려 동정의 대상으로 비추어 방송한 Comedy TV의 〈데미지〉는 시청자 사과를 해야 했다. 미디어운동본부는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정된 일부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을 찾아가 간담회를 하고, 동북여성민우회와 함께 동북지역에서 유료방송 프로그램의 질적 개선을 위한 거리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9월 11일 화요일 저녁 〈한국여성민우회 31주년, 미디어운동본부 20주년 후원의 밤〉 행사에서 미디어운동본부 회원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지난 20년간 미디어운동본부의 활동들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다. 나에게도 〈이 달의 나쁜 프로그램〉 선정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새삼 모니터링을 하느라 시간을 투여하고 스트레스도 받았던 그 순간들이, 성차별적인 방송문화를 개선해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고생스러웠던 기억보다 뿌듯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래서 또 그 모니터링 지옥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미투운동과 더불어 2018년 한국사회는 페미니즘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연예인이 불법촬영물 유포 협박으로 고통받는 상황이 앞다투어 보도되고, 넘쳐나는 1인 미디어 시장 속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가 거침없이 재생산되기도 한다. 지난 20년간 미디어운동본부의 활동과 그 활동이 불러온 변화를 돌아본 그날 밤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었던 한편, 그 어느 때 보다 지금! 미디어 속의 더 많은 페미니즘을 위해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디어운동본부의 활동을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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