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손목잡기·벽치기, ‘심쿵’?
민우ing
손목잡기·벽치기, ‘심쿵’?
소연(황소연) | 여는 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재미난 옛날 한드와 미드를 보며
한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생기는 궁금증. 왜 남자주인공은 말을 걸 때나, 자신의 마음을 호소할 때 등등 여성의 손·팔목을 낚아채는 것일까? 손목을 잡는 행동이 다음 장면으로 가기 위한 ‘치트키(cheat key)’라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뿐만 아니라, 일방적인 애정 고백을 빙자한 선물공세, 기습키스·포옹도 로맨스 관계 속 ‘심쿵’포인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만약 이러한 장면들 없이 드라마가 진행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드라마에서 영원히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 장면을 목격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있다’고 말하기 위해, 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는 드라마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결과를 공개하는 발표회를 진행했다. 2017년 7월에서 2018년 6월 사이 방영한 드라마를 대상으로,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이 어떤 양상으로 등장하는지를 분석하였다.1) 120개의 드라마에서 문제항목으로 총 625건이 집계되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그런 장면 정말 많은데…’라고 생각해오던 것을 넘어, 구체적으로 그 장면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를 분석하고 수치화하여 기록했다.
최근 1년 치 총 2,964편의 드라마를 모니터링 하다
이번 모니터링 결과,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 739건 가운데, ‘강제적 신체접촉’이 425건(57.51%)으로 등장한 횟수가 가장 높았다. 이중에서도 특히 ‘손목 및 팔목 잡거나 낚아채기’가 179건(34.29%)으로 드라마 장면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2) 폭력행위의 주체 성별이 대부분이 남성으로 드러났다는 사실과 함께 보면 남성 캐릭터가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을 재생산하고, 이를 로맨스의 정점으로 묘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몇 가지 장면을 함께 보자. MBC 〈병원선〉에서는 남성이 기습적인 키스를 하고 며칠 뒤, 그 남성과 상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성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여성을 답답해하며 팔목을 낚아챈다. 그리고 여성의 움직임을 방해하면서 “할 말 없냐”, “선생님한테 나 아무것도 아니냐”고 묻는다.
남성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며 반복해서 여성의 반응을 확인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뒤이어 여성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이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장면이 마무리된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다.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이 남성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풍부하게 하는 행동으로 적용된다면, 여성 등장인물에게는 로맨스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남성의 애정을 받는 위치에만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여성 캐릭터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을 수행하는 드라마 속 남성들은 소위 말하듯 ‘마초적’이다. 기습적인 스킨십·갑작스러운 소리 지르기 등으로 상징되는 이런 장면은 여성의 수동성과 비주체성이 강조되는 효과를 낳는다. 여성이 “이거 놔”라는 식으로 항의를 한다 하더라도, 앞선 사례처럼 결국 남성에게 애정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거나 다음 예시처럼 결국 남성에 의해, 남성이 원하는 곳으로 끌려가는 모습으로 장면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 MBC 〈병원선〉, SBS 〈키스 먼저 할까요〉, KBS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왕은 사랑한다〉 드라마 화면 캡처
SBS 〈키스 먼저 할까요〉의 경우가 그렇다. 여성의 집에 침입한 남성이 여성을 보자마자 씩씩대며 화를 낸다. 여성이 상관하지 말라는 취지로 한 말에도 “이렇게라도 상관 안 하면 미칠 것 같아서 상관한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뒤 분위기를 제압하며 여성의 팔을 무작정 잡아끌어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등장인물이 ‘애정에 기반한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설정이지만 결국 마초적 남성성이 드러나는 장면일 뿐이다.
비슷한 장면은 다른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이 다친 상황에서 “누가 맘대로 다치래?”라고 말 하거나, 여성의 상견례 자리에 찾아가 “이 여자 제가 데려가겠습니다”라고 여성의 아버지에게 말하는 장면 등…. 모두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안에 있어야만 안전한 존재이고, 그렇게 되어야만 로맨스는 완성되며, 여성이 ‘사랑받는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신호를 주는장면들이다. 남성은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고, 그 행위의 대상인 여성은 수동적인 캐릭터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강한 남성성을 표출해 로맨스를 이뤄내는 것이 여성에게 마치 긍정적인 스토리 요소인 듯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한국 드라마’ 손목 잡기
‘손목잡기’는 한국의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장면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 ‘Korean drama wrist grabbing’이 라는 악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3) 한국 드라마 제작자들은 폭력적인 요소를 극의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손목을 잡지 않고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 일방적으로 ‘좋아한다’고 강요하지 않고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창작의 범위 안에서도 무궁무진하게 표현되고 또 발견될 수 있다.
‘찍다보니까 익숙해서’, ‘그 장면을 넣어야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주 시청층이 여성이라서’ 같은 변명으로는 폭력이 로맨스로 포장되는 장면을 거부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출 수 없다. 드라마 제작자들은 시청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문화적 파급력을 가진 드라마가 폭력을 로맨스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 시청자들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끝없이 문제제기 할 것이다.
1) KBS1, KBS2, MBC, SBS, JTBC, MBN, TV조선, OCN, tvN 총 9개방송사의 120개 드라마를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모니터링단은 총 40명으로 모집 홍보를 보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2) ‘로맨스로 포장된 폭력’의 종류는 객관식 선택지를 통해 중복 집계하였다. 그 중 ‘강제적 신체접촉’은 ‘손목·팔목 잡거나 낚아채기’, ‘기습 키스’, ‘기습 포옹’, ‘벽치기’ 등 세분화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3) 포털사이트 구글 검색창에 ‘wrist grabbing(손목잡기)’을 입력하면 ‘wrist grabbing in korea’, ‘wrist grabbing in korea drama’가 추천 검색어로 뜬다. 한국드라마에 자꾸만 등장하는 손목잡기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외국인들도 궁금했던 것으로 추청된다.
더보기>> 모니터링 결과 발표회 후기
다운로드>> 결과 자료집<드라마 속 연애 각본 다시보기:손목잡기, 벽치기? '심쿵'아닌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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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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