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상반기 [민우ing]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할까?
[민우ing]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할까?
김진선(제이)/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친구의 어머니가 직장암으로 투병 중이셨다.
어느 날 친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가 수술 이후 배변 조절이 안 되어 불편해하셨는데, 의사는 ‘살아남은 게 어디냐’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더라고.
물론 생존은 중요한 문제다. 의료의 목적은 육체적 고통을 경감시키고 환자를 생존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듯 중증질환을 겪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지 ‘살아남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매우 짧은 시간 지속될 뿐이라 하더라도 그 ‘삶’은 언제나 생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한창 일할 나이’라는 4~50대에 암이나 뇌혈관계 질환, 심장질환 등 큰 병을 경험했다는 사람을 드물지 않게 접한다. 2011년 국립 암센터 자료에 따르면 유방암의 경우 발병률 자체도 꾸준히 늘고 있지만, 연령대별 발병률 중 40대가 35.3%로 가장 높다. 암환자의 의학적 완치율로 여겨지는 5년 생존율은 66%가 넘는다. 검진 기술과 치료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즉, 중증질환 병력(病歷)을 가지고, 짧지 않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진 셈이다. 그러나 통계는 생존에 대해서만 말해줄 뿐이다. 우리 사회가 그 ‘삶’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환자가 되어 사라지는 사람들
우리 엄마는 자기 친구들한테 (딸이 아프다고) 하나도 얘기 안 했어요. “왜? 엄마는 내가 창피해?” 이랬더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거 걸리면 얼마나 말이 많은 줄 아느냐”, “네가 몰라서 그런다”고 막 그러더라고요. (...) 내가 암 걸리고 나니까 옛날 친구들이나 주변에서 와서는, “사실은 나도 유방암이야. 근데 나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 신랑하고 자기 엄마아빠 밖에 모르고, 시어머니, 형님도 모르고. 이런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 K(44세/유방암)
“아, 저 유방암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딱 그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확 약자가 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친구들한테 말할 때는 그런 걸 못 느꼈는데, 나를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내가 굉장히 약자가 된 느낌이 들었고. - M(43세/유방암)
큰 병에 걸린 사람은 갑자기 ‘환자’가 되어 주변에서 사라진다. 투병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전해져’온다. 주로 ‘발병-진단-치료-완치/죽음’과 관련된 의료의 문제로, 아니면 곁눈질하고 수군거리는 대화의 소재 정도로 다뤄진다. 또는 비극적이거나 감동적인 사연으로 부각된다.
사실 질병 경험은 일상에서 연속된다. 투병 당사자는 병과 함께 수많은 변화를 거치며 자신을 새로이 쌓아간다. 하지만 타인들에게 중증질환은 일상 바깥의 사건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래서 병을 겪은 사람은 그저 '환자'라는 정체성으로만 불러 세워지거나, 때론 사건이 '끝난' 것처럼, 병을 ‘극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기를 암묵적으로 종용 받는다.
이는 개인의 태도에 달린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질병 경험은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재현된다. 여전히 환자를 낙인찍고 배척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건강한 사람만을 기준으로 하는 일터는 아픈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한다. 투병과 복귀의 과정에서 당사자가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는지는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삶,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이 삭제될 때 그 존재는 독자적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뭉뚱그려진다. 그렇게 ‘우리’와 ‘저들’은 구분된다. ‘건강한 사람들의 세계’는 큰 병을 겪는 사람들을 ‘저들’로 묶어냄으로써 유지된다. ‘저들’은 목소리가 아닌 이미지로 나타난다. 죽음과 고통, 비극, 취약함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를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은 큰 병에 걸리면 삶이 다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달래기라도 하듯 건강검진, 건강보조식품, 보험에 대한 말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투병 이후에도 지속되는 일상 그리고 이야기
제가 젊어서 아팠잖아요? 그니까 아프고 난 이후에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앞이 좀 막막했던 거 같아요. 그 이후의 삶. 물론 50%라는 확률이 절망스럽기는 했지만 저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은 다음에는 뭐 하지?’ 그게 되게 막막했어요. -J(45세/유방암)
환우모임에 참여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 행복일까. 나는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매일같이 건강만 생각하고 나만 생각하며 사는 게, 이렇게 80을 산다 한들, 내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그래, 내가 재발을 해서 죽는다 하더라도 원래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며 살아야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 -K(44세/유방암)
중증질환을 겪은 사람들도 ‘일상’을 살아간다. 여전히 복잡다단한 일상이다. 병의 완치 말고도 다양한 목표와 지향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생활인으로서 나날의 살림살이를 꾸려가야 할 것이다. 환자라는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즉,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가족구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 복합적으로 겪는 경험과 고민이 있을 것이다. ‘발병과 완치’의 서사로 다 담을 수 없는 일상의 이야기가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제각각 다른 그 삶도 지금 여기를 함께 딛고 있다. 성별과 직업에 따라 자원이 달리 주어지는 사회, 현대의학에 대한 맹신과 불신이 공존하는 사회, 불안과 경쟁이 어디에서나 화두인 사회. 중증질환을 겪는 사람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 구조와 구도에 적응하거나 협상하고, 저항한다. 그 이야기는 투병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과 겹쳐질 수도 있고, 잘 보이지 않던 이 사회의 면모들을 새로이 펼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픈 여자들의 일상:복귀 프로젝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세계는, 빠르게는 아닐지라도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中
여성건강팀은 올해 <아픈 여자들의 일상:복귀 프로젝트>라는 사업을 통해 중증질환을 겪어내고 일상에 복귀한 25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전함으로써 ‘투병’과 ‘복귀’를 개개인의 과제가 아닌 공동체가 함께 관심 가져야 할 이슈로 재조명하려 한다. 25명의 이야기는 투병 당사자의 주변인, 지역사회, 의료기관, 직장에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여성건강팀은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한 소책자와 영상 제작, 연구 분석 발표와 정책 제안을 통해 이 이슈를 알려나갈 예정이다.
‘취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자’로 남기 위해 모두가 아등바등한다. 취약한 위치에서 경험하는 구체적 현실을 외면한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고통과 곤란함 들이 개인의 책임으로만 남을 것이다. 계속해서 불안하고 외로울 것이다. 아픈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의 취약성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몸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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