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우리에게 남긴 것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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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의 트랜스젠더 포용 활동을 위한 모임인 <트랜스 컴트루>에는 세 개의 팀이 있는데요!

그 중 '콘텐츠 팀'에서는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콘텐츠를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9월 한 달간, 한 편의 단막극「삼촌은 오드리햅번(2019)」과 세 편의 영화(「2만 종의 벌(2023)」,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 「 플루토에서 아침을(2005」)까지 총 네 편의 작품을 함께 보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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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팀 참여자 열 분 중 세 분이 영화 감상평과 함께 '나에게 트랜스 컴트루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써서 보내 주셨어요.


소중한 후기와 감상평...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혐오에 지친 내가 트랜스젠더 영화로 위로받기



서로

 


나는 혐오에 지쳤다

 

나는 혐오에 지쳤다. SNS에서는 계절마다 혐오 플로우가 되풀이되고, 언론 지면에서는 혐오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인용된다. 그 장면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이게 내가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트랜스컴트루에 참가한 이유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발언이 심각하게 느껴졌고, ‘페미니스트’임을 내세우며 트랜스젠더 혐오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바랐던 것은 혐오로부터 안전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내 생각을 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결국 연대와 공존의 사상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게 된 이후, 페미니즘은 언제나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하기 위한 이유였다. 내게 페미니즘 실천이란 가부장제가 주변부로 밀어낸 사람들을 중심에 세우고, 누구도 성역할 고정관념에 납작하게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고 외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트랜스젠더를 배제하자는 사람들이너무 많아졌다. 심지어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옹호하는 글에 다짜고짜 “트랜스젠더가 먼저 여혐했는데요?” 라는 인용이 달린다. 예전엔 트랜스젠더가 여성에게 피해를 줬다는 가짜 뉴스나 왜곡된 기사 링크라도 걸더니, 이제는 그런 근거조차 없이 ‘트랜스젠더 존재 자체가 여혐’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통용된다. 아이고 머리야….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냥 “나는 나, 너는 너”하며 생각이 다르면 스루하고 지나가세요 하는 게 맞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던 나에게 트랜스컴트루 모임은 같은 질문과 고민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자료들이 곧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 운동의 장을 만들어 왔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료로 이어진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한편 아쉬웠던 건,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트랜스젠더 당사자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무지한 상태에서 “혐오하지 말자”고 말하는 게 과연 어떻게 들릴까? 혹시 나도 모르게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또, 내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누군가 나를 두고 “시스젠더라서 그렇다”고 단정짓는다면 그것 또한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 끝에,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다룬 영화를 함께 보고 감상을 나누기로 했다. 영화 몇 편으로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존 영화들이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묘사해왔는지,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볼 수 있을 테니까.

 

트랜스젠더 영화로 트랜스젠더를 보는 어려움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되 대상화되지 않고, 배경의 단역으로 머물지 않는 작품. 트랜스컴트루 모임에서 영화를 고를 때 세운 기준이었다. 문제는 내가 본 작품이 워낙 적어서, 어떤 작품이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설령 작품을 고른다 해도, 실제로 그런 요소를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트랜스젠더를 다룬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질 때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 제작이나 감상에 정답은 없겠지만 적어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회의에서 선정된 네 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우리가 선정한 작품은 <2만 종의 벌>, <삼촌은 오드리 헵번>,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플루토에서 아침을>이었다. 네 작품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영화가 저 시기에 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고 놀란 것도 있었고, ‘아... 2025년 감수성에는 도저히 안 맞네요’ 싶은 작품도 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덕분에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작품을 보는 나만의 눈’을 조금은 갖게 된 것 같아서다.

 

트랜스젠더를 ‘전형적’으로 묘사하느냐 아니냐는, 생각보다 내게 결정적인 기준이 되지 않았다. 언뜻 ‘전형적’으로 보이더라도, 그 사람이 왜 그런 모습과 태도를 선택했는지 맥락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설득력 있고 좋지 않은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외형을 어떻게 표현하든 비난받기 쉽다는 걸 생각하면 ‘전형적이다 아니다’라는 잣대를 시스젠더가 들이대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스젠더 중심 사회에서 트랜스젠더가 어떤 고민을 겪고, 그 끝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옳은 차림’이나 ‘적절한 태도’를 시스젠더끼리만 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시스젠더 중심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왜 이렇게 입냐, 왜 그렇게 행동하냐”고 따지기 전에, 성정체성의 표현 방식에 대해 트랜스젠더 당사자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이 존재해서 고마워

 

트랜스컴트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런 영화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아예 몰랐을 것이다. 특히 이 중 두 편의 한국 작품을 만든 제작진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다. 한 편은 2008년작, 다른 한 편은 2019년작이다. 완성도나 메시지는 서로 달랐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극심한 사회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고맙다. 두 영화 모두 트랜스젠더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동안 방구석에서 “혐오자가 너무 많다”고 투덜거렸지만, 많게는 17년 전, 적게는 6년 전에 이미 그런 혐오를 뚫고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트랜스젠더 영화를 보자!

 

 

 

 


 

 

트랜스젠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동망

 


2024년 12월부터 2025년 4월까지, ‘차별금지법 지금 당장’ 피켓을 나눠주고 ‘가능충(팬섹슈얼)’ 깃발을 펄럭이며 광장에서 보낸 4개월은 나에게 윤석열 탄핵 집회 그 이상의 의미였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비-이분법 정체성으로 소개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일에 힘썼다.

 

그런데 가시화가 되는 만큼 혐오의 목소리도 커졌다. 트랜스젠더가 집회 무대에 오르면 호응이 줄었고, ‘윤석열’이라는 공통의 적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자 ‘트랜스젠더는 허상’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들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겐 이를 위한 언어가 없었다.

 

무력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감사하게도 민우회의 <트랜스컴트루>를 만났다. 부끄럽게도 나는 성향상 혼자서는 절대 각 잡고 공부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래서 당사자는 아니지만 앨라이로서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든 어필하고 싶어 <트랜스컴트루>를 신청했다…… 그런데 쓰고 보니 ‘응원한다’는 말도 이상하게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응원하네 마네 할 수 있겠나. 아마도 혐오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진심을 다해 증명하고 싶어서 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구구 님이 이끄는 콘텐츠 팀에서 활동했다. 첫 시간에는 다 같이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콘텐츠를 찾아봤다. 생각보다 더 내가 아는 작품이 없었다. 간신히 몇 편을 추천했고, 이후에는 다른 팀원들이 추천한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새롭게 만난 작품은 「삼촌은 오드리햅번(2019)」, 「2만 종의 벌(2023)」,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 세 편이었다. 지금부터 쓰게 될 감상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삼촌은 오드리햅번」에는 예상치 못하게 익숙한 배우를 발견해 놀랍고 반가웠다. 이 배우를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으로 봐도 될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진위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 괜히 확인했다가 배신(?)당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2만 종의 벌」이었다. 성별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디스포리아를 겪는다. 그런데 우리가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청소년이나 비청소년 트랜스젠더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다(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 식견이 짧은 탓이다. 정말 미안해요). 이 영화는 그 틀을 깨고 ‘아동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영화를 보면서 ‘MTF 트랜스젠더가 사회적 여성성을 탐내는 남자’라던 혐오자의 주장이 떠올랐다. 그들과 이 영화를 함께 보고 다시 묻고 싶다. 정말 그런가?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성을 학습하여 그 여성성을 다시 강화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식의 잘못된 믿음으로, 아이가 여성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통째로 부정해버려도 괜찮은지 말이다.

세 작품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건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다. 이 작품이 세 작품 중 접근성이 가장 높다. 17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읽히는 작품이다. (퇴보는 금방이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면 20년이 필요하다니.)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언제, 어떻게’ 등장시키는지 그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사람조차, 트랜스젠더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고, 그들은 일상 속에서 내 옆에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현아-혜숙의 관계가 퀴어적이라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갖고 트랜스젠더-페미니즘 콘텐츠를 선택해야 할까. 예전엔 트랜스젠터 캐릭터가 등장하면, 그것이 조롱이든 진지한 시도든 반쯤은 의무감으로 봤다. 전자의 경우 정체성이 개그로 소비된다는 점이 불쾌했고, 후자의 경우 자극이 부족하다고 느껴 여러 번에 나눠서 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혐오적 맥락’을 안고 등장한 캐릭터라도 그냥 눈 감고 넘어가고 싶지 않다. 납작하고 편협한, 혐오로 얼룩진 시선으로 그려진 캐릭터들을 더 이상 ‘등장한 것만으로도 어디냐’는 마음으로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어떤 작품을 보고 싶은지도 생각해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나는 트랜스젠더가 ‘특별하지 않게’ 등장하는 작품을 보고 싶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트랜스젠더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는 ‘특별한’ 등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그를 주제로 하는―특히 MTF를 설명하는― 인권 영화는 제법 그 수가 늘지 않았나. 또, 트랜스젠더가 가시화되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페미’가 그러하듯) ‘트젠’이라는 말만 봐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오히려 시스젠더와 다를 바 없는 인물로 그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바로 그거다. 눈으로 구별된다고 믿는 건 대체로 허상이다. 물론 당연히 시스젠더일 거라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사실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은 작중에 한 번쯤 밝혀야겠지만.

 

2025년 8월, 사전 공부랄 것도 없이 참여한 프로그램이기에 무지라는 이름을 쓴 무례를 범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들 나와 비슷한 불안감을 안고 오신 것 같았다. 안도감에 조금 웃었다. 근심과 안심을 몇 번 넘어다니다 보니 약 두 달 간의 트랜스컴트루 활동이 마무리되었다. 활동을 마치고도 내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줄 알았건만 10월의 어느 날 문득 트랜스젠더 조롱 플로우를 웃어넘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 팀원 분들이 꾸려 주신 앨라이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지낸 덕분이리라. 혐오를 지적함으로써 그룹의 분위기를 망치더라도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하게 듣고 있기만 해 봐야 내 침묵은 입안 가시처럼 나를 주기적으로 찌를 테니까. 그리고 어쩌면 내 발화에 누군가는 동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트랜스젠더 혐오가 불편한 우리는 같은 편인 겁니다. 친하게 지내요.

 

 

 

 


 

 

트랜스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


익명

 


SNS 상에 넘쳐나는 ‘페미니즘을 가장한 트랜스 혐오’에 마음이 지쳐, 페미니스트로서도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서도 갈 길을 잃은 듯했던 어느 날, 민우회의 ‘트랜스 컴트루’ 활동 기획을 보게 되었다. 온라인상의 혐오 속에 숨어들던 마음에 오랜만에 희망이 번졌다. 더 이상 혐오의 물결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는 마음, 미약한 행동일지라도 트랜스젠더와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교차로를 함께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냉소에 젖어 있던 나는, 함께 고민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 참여를 결정했다.

 

함께 모여보니, 이 문제에 심각성을 느끼고 각자의 자리에서 혐오에 맞서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갈림길이라 여겼던 길이 사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우리는 미디어 속 트랜스젠더 재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대중에게 트랜스젠더의 삶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는 미디어 속 트랜스젠더를 어떤 기준으로 단정하며 바라보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트랜스젠더, 그중에서도 트랜스 여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정형화된 여성성의 틀 안에서 소비되는지를 함께 분석했다. 이를 통해 트랜스 여성이 ‘왜곡된 여성성을 강화한다’는 흔한 혐오 서사를 반박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했고, 동시에 ‘여성됨’의 의미를 새로이 정의할 수 있었다.

 

여러 작품을 보며 나는 트랜스젠더의 존재 투쟁이 여성의 존재 투쟁과 얼마나 닮아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비여성적인 여성, 규격 외 여성, ‘여성이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탈락시키는 사회의 여성혐오와 이분법적 젠더 체계 속에서 배제되는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젠더퀴어를 향한 혐오는 뿌리가 같다. 그것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다.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이 시선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모든 정의와 틀, 선과 이상을 깨부수고 오롯이 존재할 것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 그 목표 아래에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발붙일 자리는 없다. 그 사실을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다잡아주었다.

 

트랜스 혐오라는 현상 속에서 페미니즘이 해야할 일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각자 고민하고 말로 풀어내는 과정은, 온라인에서의 공허한 혐오보다 훨씬 더 실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민우회의 ‘트랜스 컴트루’뿐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여성혐오를 비롯한 모든 혐오에 맞서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런 자리가 더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상황을 바꿀, 더직접적이고 용감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