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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여성주의실천 바톤터치] 로리의 언중유언골

2013-10-11
조회수 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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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자매님~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입회원 로리라고 합니다. 새 글을 쓰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처음 바톤을 받아달라고 연락을 받았을 때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너무나 반성 중입니다. 
단지 한달 넘게 기한을 넘겨서요? 아뇨.
생각해보니까 제가 입만 살았지 생활 속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게 없었던 거예요.
아무리 게을러터졌어도 쓸 게 많았으면 중얼중얼하고 싶어서라도 좀 더 일찍 글을 썼겠죠. ㅠㅠ 불이 발등에 떨어지다 못해 무릎까지 다 타들어갔더라고요.


그 사이 민족의개족보존재이유확인을 위한 대명절 연휴가 있었죠.
나름 추석이 지나면 뭔가 쓸 게 생길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저는 비혼이지만 저희 집에는 며느리도 있거든요!
가부장적인 남자식구들도 있죠. 대놓고 아들 우선은 아니지만, 명절 일을 남자들에게 거들라고 시키지 않는/못하는 아주 고집세고 무서운 엄마도 있죠. 별로 제 설 자리는 없어요.
게다가 저희 새언니는 제가 태어나서 본 중 가장 착하고 가장 사회가 주입한 관습과 예절과 상식을 제대로 주입받은(?) 현대에 보기드문 여성이에요. 잘 돌아가는(것처럼 보이는) 집안에 파문을 일으키려는 저의 입지는 거의 없죠. 그래서 커다란 사건은 없었고요...

일단 저는 집안의 유일한 꼬맹이인 남자 조카가 3살일 때부터 같이 전 부치는 데에 동참시켰습니다.
겨우 크레파스를 들 때쯤 "동그랑땡을 달걀물로 샤워시키는 놀이"를 가르쳤고, 그 지겨운 산적꽂이도 색깔놀이라고 입력시킨 결과 이제 7살이 된 조카는 당연히 동그랑땡을 부칠 때면 나무 주걱을 가지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달걀샤워놀이'를 즐기고 올해 추석에는 고난도인 버섯전도 부쳤답니다.
하지만 이제 초등학생이 되고 더 커 가면 삼촌이나 아빠처럼 티비앞에 드러눕고 싶어하겠죠. 저는 그들과 별로 친밀하지 않아서 남자식구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지는 못해요.

다만 저의 소극적인 행동은 꾸준히 조카에게
"다같이 먹는 것은 다같이 만드는 거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다"
"나중에 커서 형아가 되어도 이렇게 할머니와 엄마를 도와 다 같이 만드는 거다"고 주입시키고, 또 이렇게 전을 부치며 천사같은 새언니와 어색한 대화시간을 가질 때만이라도 가사노동 역할분담을 화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거나 하는 것 정도예요.

사실 이런 일방적인 가사역할 분담이 너무 싫어서 대학생 때는 무조건 과제있다, 수업있다, 아르바이트있다 핑계대면서 명절 전날 도망가기도 했어요. 그 때 만난 여성주의모임의 선배들은 "하지만 로리, 회피와 불참도 방법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노동만 사각지대에 놓이게 돼요."라고 충고해주었어요.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자니 너무 골치가 아프고 몸도 피곤하고 현실은 싫고 하니 이기적으로 도망친 게 맞거든요. 이런 불평등한 현실에 협조할 수는 없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죠.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엄마와 새언니의 명절노동을 돕되, 가짓수를 하나씩 줄여나가고 잔소리를 하는 미운 짓을 맡기로 했어요.
사실 평범하고 가족들끼리 사이가 좋은 집이라면, 오빠든 남동생이든 각자 주걱과 뒤집개 하나씩 들려가며 분업체제를 도입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저희 집은 그다지 식구들 간 대화가 없고 제 나쁜 성격 탓에 각자 사이도 좋지 않아서, 오히려 친밀한 관계일 때 가능한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었어요.

아마 명절 가사노동은 저의 장기프로젝트가 될 거예요. 독립하게 되면 몇 가지를 맡아서 만들어 간다거나, 엄마를 설득해서 여행을 보내버린다든지,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잔소리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너무나너무나 소극적이고 사소할 수밖에 없는 실천을 할 겁니다.
또 성장해가는 남자 조카에게 잘못된 성역할 구분이 인식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일단 최대 과제랍니다. 자라나는 새싹을 좀 제대로 양성해서 거꾸로 고목들을 바꾸어 보려고요. ㅠㅠ


또 하나는 요새 너무나 흔해져서 걸어다니다가 그냥 발에 채이기 마련인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에 대해 대응을 하며 겪은 경험인데요. 이건 사실 좀 별 것 아닌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혹시 재미있어 하실지도 몰라서 소개를 합니다.

작년에 한 공중파 방송사에서 스포츠종목의 대회 중계를 하나 맡았어요. 이 종목의 한 선수 이름에 zil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데 이걸 그 방송사에서 중계를 하면서 '칠'이라고 발음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 전에는 '질'이라고 불렀었거든요. 그런데 대회가 시작되면서 모든 중계진들이 다 공식발음을 지정해놓고 마치 이름을 바꾼 느낌을 주더라고요.
이 일과 관련해서 SNS에서는 정말 광풍이 몰아칠 정도로 순식간에 그 '사건'의 이유를 호도하는 이상한 여론이 형성되었었어요.

"zil 이라는 스펠링의 한국어 발음이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와 같기 때문에 2년 전 대회에서는 원래대로 불렀었는데도 이제 여성가족부가 그 운동선수의 이름을 바꾸어부르게 만들었다"는 여론이었어요.
"이 얼마나 무식하고 막무가내인 행동이냐, 고유명사를 무조건 바꿔부르게 해도 되는 거냐, 역시 하는 짓이 다 그 모양이다"는 식의 얘기가 계속 되풀이되더니 순식간에 '여성주의나 페미니스트들은 무식하고 어리석다'며 조롱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사실 일개 행정부처가 자기네 소관이 아닌 일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평소에 가졌던 여성주의와 여성가족부에 대한 반감(실제로 둘의 연관성이 적음에도 불구하고)과 위기감이 비웃음과 조롱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죠.

너무나 화가 난 저는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해서 사이트에서 외래어표기법 링크를 찾아 읽어봤어요. 그런데 일관되게 적용되는 기준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 네티즌으로서(...) 그 소관 방송사 관련부서에 전화를 했습니다(...).
연결이 한 번에 되지는 않더라고요. 한 이틀 전화하다보니까 연결이 되었는데 마침 전화를 받으신 분이 스포츠중계를 담당하는 아나운서 분이었어요. 그 종목 중계를 한 10년 정도 맡아하신 분이더라고요.
이 분께 이번에 이런 식으로 선수의 이름을 바꿔서 부르는 중계 내용이 이런이런 부처의 지시였다는 얘기가 있던데, 보통 고유명사의 발음을 통일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결정을 하시느냐고 질문을 드렸어요. 이 때 약 25분 가량 통화하면서 이 분이 정말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고요.

결론은 그때그때 방송사와 국립국어원이 함께 원칙을 정하되, 독일어에서 zil은 '질, 칠, 찔, 즐' 등 아주 다양하게 발음이 된다는 거였어요. 즉 여러 가지를 고려한 방송사와 국립국어원의 선택이었던 거죠. 국립국어원의 외국어표기법이 원칙이되, 방송사의 내부논의에 따라 1.현지발음에 가깝게 2.실제로 선수들과 팬, 운동종목 내부에서 통용되는 발음을 고려하고 3.동시에 한국어의 외래어표기법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라는 3가지 기준에 맞춰 대회마다 달리 적용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내용을 제가 정리해서 SNS에 올렸고, 너무 심한 편견을 보이는 주장에는 제가 알아본 내용을을 토대로 반박을 했고요. 저에게 '분명히 몇년 전에 여성가족부가 그렇게 압력을 넣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물론 링크를 찾아오지는 못했고요. 정말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놀라우면서 팩트를 확인해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죠. 방송사와 국립국어원도 아무 생각 없이 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거꾸로 방송사가 국립국어원에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참 별 거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 당시에는 무척 속상하고 울컥하고, 여성주의가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루머를 가지고 소비되고 비난받고 조롱당하는 것에 분노까지 일더라고요. 또 운동은 여성들의 사각지대로 여겨지기 쉽잖아요. 그런 면에서 나쁜 편견을 재생산하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손을 떨며 ㅋㅋㅋ 아나운서 분과의 통화내용을 받아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거의 매일 정말 많은 여성혐오를 목격하고 겪어요. 이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저의 거의 모든 자매들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해요. 저는 위의 경우에 팩트를 확인해서 대응했지만, 늘 정면돌파하는 것은 어쩌면 소모적일 수도 있겠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작년 여성주의라이브러리 강의에서 시타가 제안한 대응방법도 좋았어요. 정색하고 맞서서 오히려 그걸 뭔가 대단한 것처럼 키우는 것보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재미없는 농담인 것처럼, (비)웃으며 눌러주라고요. (맞나?) 꼭 전투적이고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태도로 일관할 필요가 없이, 힘을 빼는 방법도 효과가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어요.
말 속에 연골을 넣자 전략이랄까요.

'ㅇㅇ는 이래야만 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된 성역할을 재생산하는 얘기를 할 때는 늘 굳은 얼굴로 비웃고 깎아내려야만 만연한 여성혐오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면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무조건 정색하거나 엄청나게 큰 뼈를 넣어 다다다 제 말만 던지지 않고, 슬쩍 흘리듯 말한다거나, 농담에 좀 딱딱한 거 말고 연골정도 되는 물렁한 뼈를 담아 던지는 것도 효과가 좋았어요! 개드립은 개드립으로 받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머리가 좋고 책도 많이 읽고 정리도 잘 해야겠더라고요) 


매일같이 끊임없는 성역할 분담, 획일화된 외모기준을 적용받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인 편견에 희생되는데, 사실 제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편견과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 낸 기준들을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이에요.

한동안은 획일적인 외모 기준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스스로 손에 잡히는 살, 더 작은 사이즈의 옷, 끊임없이 먹는 양이나 운동량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정말 인지부조화같은 것을 겪겠더라고요. 남이 나에게 55사이즈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스스로를 55사이즈 옷에 밀어넣으려고 하고있고 그게 안되면 괴로워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남이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야! 라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 뻔한 자기기만처럼 느껴졌어요. 어디까지가 사회가 주입한 기준이고 어디까지가 나 스스로가 원하는 기준인지 그 경계를 정확하게 알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건강 뿐 아니라 동시에 탄력있고 옷발잘받는 몸을 원한다는 것을 아니까요. 이런 고민은 사실 여성인 나의 몸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비혼여성으로서의 나의 욕망, 비딱해지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나의 현실에 실제적인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등 많은 부분에서 저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한 가지는 분명해졌어요.

이제 더이상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괴롭지 않고, 고민에 정답이 있다거나, 해답이 있다고 해도 한 가지뿐이라거나, 내가 그 해답을 꼭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점이에요.
이 과정은 여러가지 책과 영화나 강의, 많은 자매님들의 혜안이 담긴 글, 또 민우회 행사 등 많은 것의 덕분이었어요. 저의 고민은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보편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해답은 있을 수도 또 없을 수도 있고, 찾지도 찾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괴로운 과정이 아니라 이제는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이라고 저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막상 저는 실천하는 방안은 뚜렷하게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요. 대수롭지 않은 소극적인 행동들의 나열에 불과해 보이네요.

하지만 저에게 이렇게 제 생각을 길게 정리할 수 있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요. 

바톤터치 부탁을 받고서

'어떡해 난 망했나봐, 실천하는 게 개뿔 하나도 없어ㅠㅠ망했어ㅠㅠ'
하고 울부짖었던 것이 결국에는 자극으로 남은 것 같아 약간 기쁩니다.
이제 더 구체적인 여러 가지를 꼭 생각해보고 평생에 걸쳐 꾸준히 실천하는 게 남았네요.


저는 사실 전화를 받고나서 이전 릴레이 글을 읽고 너무나 훌륭한 내용들이 많아서 절망했었는데요. 다음 바톤을 받아주실 분은 부디 제 글을 읽으시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ㅋㅋㅋㅋ
"아, 저런 글도 있구나'하고요^^
저도 계속해서 여성주의실천 바톤터치 주목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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