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월) 오후 2시 성평등복지팀(온다, 나래, 바사, 류)의 3번째 세미나 시간을 가졌습니다.
3번째 세미나의 주제는 '돌봄'으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지음)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책에 적힌 부제 처럼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
저자 중 한 분인 김영옥 님의 여는 글 13페이지에 적어 놓으신 글처럼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한 글 6편에 이야기입니다.
- 차례 -
-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 '보호자'라는 자리
- '병자클럽'의 독서
-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
-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 시간과 노니는 몸들의 인생 이야기
이번 세미나는 유연하게 인상 깊었던 구절이나,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가장 먼저 '책 어땠어요?'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팀원 1:무슨 일을 해야 하나에 대해 생각하며 읽으니 더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어요.
정상성 강박을 떨쳐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대중운동 단체로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팀원 2:의제를 만들 때에도 페미니스트 건강해져서 다른 사람들 돌봅시다.라는 말로 안 들리게 하기 위해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론적으로 의제를 알리기 위한 홍보물을 보면 그런 뉘앙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정말 생각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팀원 3:가족이 감당하던 부분에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비어있는 부분을 시민적 돌봄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이 갔어요.
돌봄의 특성상 공공이 전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결국 관계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양한 관계들이 시민적 돌봄이라는 개념에 포섭될 수 있는 것 같아서 공감이 갔습니다.
- 필요한 단어는 부정 의한 떠넘기기와 돌박의 고통으로 표상되어온 '가족 돌봄'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중략-
'믿을 건 가족밖에 없는' 사회에서 '믿을 건 돈밖에 없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을 대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없다.
다치고 아프고 늙고 언젠가는 죽어가는 취약한 존재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연루되어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돌봄 관계다. 이 보편성을, 이 불가피성을, 이 공동의 운명을
'시민적 돌봄'이라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67~68페이지]
팀원 4:돌봄을 했던 경험들에서 마음속에서 부딪침이 있었어요. 날것으로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다 했을 때
내 주변의 상황, 가지고 있는 자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지만 기존의 '가족 돌봄'의 경험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와 이내 회피했었거든요. 거의 공포감 속에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시민적 돌봄이라는 개념으로 모두가 함께 한다면 책에서처럼 적어도 지금처럼 두렵고 불안한 사회는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팀원 1:돌봄을 해야 되는 상황 속에 있어서 내 상황에 이입해서 읽었어요.
시민적 돌봄을 하자고 했지만 그 또한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 할 일이기에,
지금 당장 내가 돌봄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암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어서, 인상 깊었던 책의 구절이나 주변의 돌봄의 경험이나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팀원 3:지금 사회에서는 잘 돌보는 사람일수록 돌봄 받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어머니를 보면서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으면서 돌보는 사람으로 보게 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본인이 굳건히 서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기도 하시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내가 흔들리면 내가 돌보는 사람이 망가진다는 생각이라든가,
당신이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도 내가 돌보는 사람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팀원 2:혼자 돌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돌봄이 될 수 없지 않나 싶어요.
돌봄은 관계에 기반하는 일이고 감정이 오고 가는 일인데 한 사람이 돌볼 때 의존하게 되고 거리 두기도 힘들어지기도 할 거 같아요.
팀원 1:책에서 돌보기도 하고 돌봄 받기도 하는 유연한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일생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데 우리는 아직 한 장면을 잘 해내기도 어려운 상황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팀원 4.독박 돌봄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고요.
서로가 적정선의 거리감이 없다면 돌보는 사람은 지금 내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죄책감이 부여되기도 하고.
돌봄 받는 사람은 한 사람과 소통하는 게 편하고, 다른 사람에게 간병을 받는 게 불편할 수도 있지만 서로의 적정선의 배려와
거리감이 없다면 결국 모두에게 안 좋은 상황이 되니까요.
팀원 2:맞아요. 돌봄은 나눠서 해야 하고 환기할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한다"라는 협박은 내 마음속에 서도 자주 메아리치던 말이었다.
그 '나중'의 후회를 겁내느라 '지금'을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환자와 보호자의
"생과 사의 조건은 동일하다."-['보호자'라는 자리 중] - 밀알, [[아빠의 임종... 우리의 선택은 옳았던 걸까?]]
-비혼여성의 가족 간병 경험을 듣다 인용 구절 127페이지.
- 무엇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둘만 아는' 현실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모두의 유한성과 온갖 '어쩔 수 없음'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상황을 매개하는
'적당함'의 감각,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의 갱신되는 상호적 관계성이 없다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한계에 몰리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중략-.
좌충우돌하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다시 시작하고, 어찌어찌 버티느라 할 말이 없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지속되는 돌봄의 현장으로 다시 발길을 옮기는 의미를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문해력은 그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태어난다. - '보호자'라는 자리 중. 130~131페이지.
또 다른 팀원분은 막연한 치매에 대한 공포가 있었는데 구체적인 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셨답니다.
- 그녀에게 자기소개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요청하자 그녀는 커다란 선언을 할 것처럼 한 번 숨을 깊이 쉬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안 계시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요. 저희 시어머니는 똥칠을 하세요."
그 자리에 있던 한 참가자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며, 그것 역시 본인이 '뒷처리'를 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이야기하자 그녀의 마음도 좀 풀어진 듯했다. 중략..
교육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그녀도 시어머니도 모두 표정이 좋아 보이신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자신이 예전처럼 하나하나 통제하지 않으려 하고, 시어머니도 문제를 덜 일으키고 있다며 웃었다. 중략.. "
우리 어머니는 시인이세요.""네? 시를 쓰시나요?" 하고 되묻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망상이 있으셔서 사실이 아닌 일을 가지고 하루에 두어 번쯤 소동을 일으키시는데,
그걸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시인' 정도가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라며,
"어머니를 그냥 '환자'라고 부르긴 좀 그렇다"라고 말했다. -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중. 228~229페이지.
- 돌봄은 서로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 반응에 응답하게 하는 민감성,
그리고 각자의 몸이 경험하는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 경험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민,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능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돌봄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중. 240~241페이지.
그 밖에도 돌봄을 둘러싼 내 안의 고민 지점과 생각들을 이야기가 되기도 하였는데요.
돌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가 있고, 간병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데, 삶에서 간병을 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고려한 시스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고, 또한, 같이 해나가고 싶은데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셨어요.
증명과 사회적 위치에서의 소속과 의무들은 관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도 덧붙여 주셨고, 또 다른 팀원은
돌본다는 의미는 꼭 돌봄을 전담하는 것뿐만 아니라 취약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들었으며,
어떻게 하면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누군가를 약하고 아프다는 이유로 내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고 운동을 해오지만
내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구체적 지식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고도 말씀해 주셨어요.
이런저런 의견 나눔 속에서 세미나 시간은 2시간을 꽉 채우고 마무리가 되었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요. 어릴 적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셨던 터라 온 가족이 돌봄에 매달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모르면 막연한 두려움이라지만, 책에서 얘기하는 '시민적 돌봄'이 구현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돌봄 받는 자의 고통을 보고,
돌봄 하는 자의 여러 복합적 감정과 고립감 속에 놓여 있었기에 저에겐 책을 읽는 행위가 다시 그 때로 회기되는 실체적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책 읽기 전 공포감이 200% 충만했달까요? 하하^^;; 저자분들이 차분히 써내려가 신 글을 읽으며, 그리고 책을 다 읽고 팀에서
서로의 불안함과 두려움과 고민들을 듣는 직면의 시간들 속에 내 안의 쌓인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힘들지만 시민적 관계 맺기로 멈추지 않고 계속된 시도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에서 전희경 선생님이 남기셨던 마지막 구절을 끝으로, 성 평등 복지팀 돌봄 세미나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3월 15일(월) 오후 2시 성평등복지팀(온다, 나래, 바사, 류)의 3번째 세미나 시간을 가졌습니다.
3번째 세미나의 주제는 '돌봄'으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지음)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책에 적힌 부제 처럼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
저자 중 한 분인 김영옥 님의 여는 글 13페이지에 적어 놓으신 글처럼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한 글 6편에 이야기입니다.
- 차례 -
-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 '보호자'라는 자리
- '병자클럽'의 독서
-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
-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 시간과 노니는 몸들의 인생 이야기
이번 세미나는 유연하게 인상 깊었던 구절이나,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가장 먼저 '책 어땠어요?'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팀원 1:무슨 일을 해야 하나에 대해 생각하며 읽으니 더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어요.
정상성 강박을 떨쳐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대중운동 단체로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팀원 2:의제를 만들 때에도 페미니스트 건강해져서 다른 사람들 돌봅시다.라는 말로 안 들리게 하기 위해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론적으로 의제를 알리기 위한 홍보물을 보면 그런 뉘앙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정말 생각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팀원 3:가족이 감당하던 부분에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비어있는 부분을 시민적 돌봄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이 갔어요.
돌봄의 특성상 공공이 전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결국 관계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양한 관계들이 시민적 돌봄이라는 개념에 포섭될 수 있는 것 같아서 공감이 갔습니다.
- 필요한 단어는 부정 의한 떠넘기기와 돌박의 고통으로 표상되어온 '가족 돌봄'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중략-
'믿을 건 가족밖에 없는' 사회에서 '믿을 건 돈밖에 없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을 대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없다.
다치고 아프고 늙고 언젠가는 죽어가는 취약한 존재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연루되어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돌봄 관계다. 이 보편성을, 이 불가피성을, 이 공동의 운명을
'시민적 돌봄'이라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67~68페이지]
팀원 4:돌봄을 했던 경험들에서 마음속에서 부딪침이 있었어요. 날것으로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다 했을 때
내 주변의 상황, 가지고 있는 자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지만 기존의 '가족 돌봄'의 경험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와 이내 회피했었거든요. 거의 공포감 속에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시민적 돌봄이라는 개념으로 모두가 함께 한다면 책에서처럼 적어도 지금처럼 두렵고 불안한 사회는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팀원 1:돌봄을 해야 되는 상황 속에 있어서 내 상황에 이입해서 읽었어요.
시민적 돌봄을 하자고 했지만 그 또한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 할 일이기에,
지금 당장 내가 돌봄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암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어서, 인상 깊었던 책의 구절이나 주변의 돌봄의 경험이나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팀원 3:지금 사회에서는 잘 돌보는 사람일수록 돌봄 받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어머니를 보면서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으면서 돌보는 사람으로 보게 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본인이 굳건히 서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기도 하시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내가 흔들리면 내가 돌보는 사람이 망가진다는 생각이라든가,
당신이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도 내가 돌보는 사람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팀원 2:혼자 돌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돌봄이 될 수 없지 않나 싶어요.
돌봄은 관계에 기반하는 일이고 감정이 오고 가는 일인데 한 사람이 돌볼 때 의존하게 되고 거리 두기도 힘들어지기도 할 거 같아요.
팀원 1:책에서 돌보기도 하고 돌봄 받기도 하는 유연한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일생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데 우리는 아직 한 장면을 잘 해내기도 어려운 상황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팀원 4.독박 돌봄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고요.
서로가 적정선의 거리감이 없다면 돌보는 사람은 지금 내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죄책감이 부여되기도 하고.
돌봄 받는 사람은 한 사람과 소통하는 게 편하고, 다른 사람에게 간병을 받는 게 불편할 수도 있지만 서로의 적정선의 배려와
거리감이 없다면 결국 모두에게 안 좋은 상황이 되니까요.
팀원 2:맞아요. 돌봄은 나눠서 해야 하고 환기할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한다"라는 협박은 내 마음속에 서도 자주 메아리치던 말이었다.
그 '나중'의 후회를 겁내느라 '지금'을 돌보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환자와 보호자의
"생과 사의 조건은 동일하다."-['보호자'라는 자리 중] - 밀알, [[아빠의 임종... 우리의 선택은 옳았던 걸까?]]
-비혼여성의 가족 간병 경험을 듣다 인용 구절 127페이지.
- 무엇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둘만 아는' 현실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모두의 유한성과 온갖 '어쩔 수 없음'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상황을 매개하는
'적당함'의 감각,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의 갱신되는 상호적 관계성이 없다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한계에 몰리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중략-.
좌충우돌하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다시 시작하고, 어찌어찌 버티느라 할 말이 없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지속되는 돌봄의 현장으로 다시 발길을 옮기는 의미를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문해력은 그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태어난다. - '보호자'라는 자리 중. 130~131페이지.
또 다른 팀원분은 막연한 치매에 대한 공포가 있었는데 구체적인 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셨답니다.
- 그녀에게 자기소개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요청하자 그녀는 커다란 선언을 할 것처럼 한 번 숨을 깊이 쉬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안 계시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요. 저희 시어머니는 똥칠을 하세요."
그 자리에 있던 한 참가자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며, 그것 역시 본인이 '뒷처리'를 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이야기하자 그녀의 마음도 좀 풀어진 듯했다. 중략..
교육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그녀도 시어머니도 모두 표정이 좋아 보이신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자신이 예전처럼 하나하나 통제하지 않으려 하고, 시어머니도 문제를 덜 일으키고 있다며 웃었다. 중략.. "
우리 어머니는 시인이세요.""네? 시를 쓰시나요?" 하고 되묻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망상이 있으셔서 사실이 아닌 일을 가지고 하루에 두어 번쯤 소동을 일으키시는데,
그걸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시인' 정도가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라며,
"어머니를 그냥 '환자'라고 부르긴 좀 그렇다"라고 말했다. -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중. 228~229페이지.
- 돌봄은 서로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 반응에 응답하게 하는 민감성,
그리고 각자의 몸이 경험하는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 경험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민,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능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돌봄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중. 240~241페이지.
그 밖에도 돌봄을 둘러싼 내 안의 고민 지점과 생각들을 이야기가 되기도 하였는데요.
돌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가 있고, 간병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데, 삶에서 간병을 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고려한 시스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고, 또한, 같이 해나가고 싶은데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셨어요.
증명과 사회적 위치에서의 소속과 의무들은 관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도 덧붙여 주셨고, 또 다른 팀원은
돌본다는 의미는 꼭 돌봄을 전담하는 것뿐만 아니라 취약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들었으며,
어떻게 하면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누군가를 약하고 아프다는 이유로 내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고 운동을 해오지만
내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구체적 지식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고도 말씀해 주셨어요.
이런저런 의견 나눔 속에서 세미나 시간은 2시간을 꽉 채우고 마무리가 되었답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요. 어릴 적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셨던 터라 온 가족이 돌봄에 매달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모르면 막연한 두려움이라지만, 책에서 얘기하는 '시민적 돌봄'이 구현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돌봄 받는 자의 고통을 보고,
돌봄 하는 자의 여러 복합적 감정과 고립감 속에 놓여 있었기에 저에겐 책을 읽는 행위가 다시 그 때로 회기되는 실체적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책 읽기 전 공포감이 200% 충만했달까요? 하하^^;; 저자분들이 차분히 써내려가 신 글을 읽으며, 그리고 책을 다 읽고 팀에서
서로의 불안함과 두려움과 고민들을 듣는 직면의 시간들 속에 내 안의 쌓인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힘들지만 시민적 관계 맺기로 멈추지 않고 계속된 시도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에서 전희경 선생님이 남기셨던 마지막 구절을 끝으로, 성 평등 복지팀 돌봄 세미나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