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여는 민우회 회원) 선생님께서 강의 중 던지신‘누가 피해자이고 여성이며,누가 가해자이고 남성인가?’라는 질문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떼어놓고 순수하게 수학적,생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어쩌면 이 질문이야말로 여섯 번의 강의를 모두 관통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가부장제의 가장 충실한‘케르베로스’역할을 자처하며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의 몸이 며느리에게는 기이하게 과장된 남성성의 그림자이고,국가의 병역의무를 강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진짜 사나이’로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병사로 분류된 총기 사고 가해자의 몸은 불완전한 트렌스젠더 섹슈얼리티가 재현된 장소라는 것.저는 이러한다중으로 교직된 젠더 이슈를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이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폭력과 외상을 가시화하는 것과 동일한 강도로 페미니스트에 의해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더 많은 계층,섹슈얼리티,더 다양한 맥락의 사람들과 연대해서 보다 더 강하고 실제적인 힘을 실어줄‘여성성’에 대한 규정과 논의의 경계를 확장하려면요. 강의 중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적당히 교양 있어 보이는 중산층 여성을 모사한 석고상처럼 연극적으로 구동되면서,미망인의 특권으로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보호받으며 모든 정치적 이슈를 탈정치화시키고있는한국의 최고 통치권자입니다. 저는 정희진 선생님의‘나는 열 명의 여성이 있다면,열 개의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814)라는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한국에서 불균질하게 동시다발적으로(혹은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며)일어나고 있는 젠더 트러블의 상이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트러블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든지 여성,피해자의 위치로 내몰릴 수 있는 대다수의 개인들이,각자의 붉은 방의 벽에 포위된 채 젠더와 그들 간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맺으며 히스테리적 저항과 아늑한 굴종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상황 속에서,‘자신의 맥락’을 지워버리지 않는 일과 이길 수 있는 싸움의‘전선’을 구성하는데 동참하는 일이 상호 모순되지 않도록 하는 것.저는 이것이 제가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섬세한 전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인상깊었던 말말말!
“모성은 여성과 아이의 관계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다”
“성매매는 젠더화 된 교환.공평하지 않다”
“여성은 재현이다.그런 점에서 중요한건 박근혜가 여성인가,아닌가가 아니라,그녀가 어떤 여성을 재현하는 가”
“이번 대선은 박정희의‘딸’이라는 박근혜의 젠더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모든 지식은 장소(로컬)성을 갖는다.젠더나 여성주의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 구성된다.”
이렇게6강을 끝으로2014민우회 열독은 마무리되었습니다.강의가 끝나고 예고해 드린 대로 전 강 출석자를 위한 정희진쌤의 선물 증정식도 있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선물만 여경활동가에게 전달하고 급히 사라지셨어요^^;)
2014민우회 열독,다들 어떠셨나요?많은 분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소감을 나누고 싶은 마음을 유체님이 정성들여 써주신 장문의 후기로 대신할까합니다.홈페이지에는 일부만 발췌하였고,전문은 블로그에 올렸어요! 더 자세한 후기가 궁금하신 분은http://womenlink1987.tistory.com/601
∙유체(여는 민우회 회원)
선생님께서 강의 중 던지신‘누가 피해자이고 여성이며,누가 가해자이고 남성인가?’라는 질문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떼어놓고 순수하게 수학적,생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어쩌면 이 질문이야말로 여섯 번의 강의를 모두 관통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가부장제의 가장 충실한‘케르베로스’역할을 자처하며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의 몸이 며느리에게는 기이하게 과장된 남성성의 그림자이고,국가의 병역의무를 강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진짜 사나이’로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병사로 분류된 총기 사고 가해자의 몸은 불완전한 트렌스젠더 섹슈얼리티가 재현된 장소라는 것.저는 이러한다중으로 교직된 젠더 이슈를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이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폭력과 외상을 가시화하는 것과 동일한 강도로 페미니스트에 의해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더 많은 계층,섹슈얼리티,더 다양한 맥락의 사람들과 연대해서 보다 더 강하고 실제적인 힘을 실어줄‘여성성’에 대한 규정과 논의의 경계를 확장하려면요.
강의 중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적당히 교양 있어 보이는 중산층 여성을 모사한 석고상처럼 연극적으로 구동되면서,미망인의 특권으로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보호받으며 모든 정치적 이슈를 탈정치화시키고있는한국의 최고 통치권자입니다.
저는 정희진 선생님의‘나는 열 명의 여성이 있다면,열 개의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814)라는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한국에서 불균질하게 동시다발적으로(혹은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며)일어나고 있는 젠더 트러블의 상이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트러블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든지 여성,피해자의 위치로 내몰릴 수 있는 대다수의 개인들이,각자의 붉은 방의 벽에 포위된 채 젠더와 그들 간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맺으며 히스테리적 저항과 아늑한 굴종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상황 속에서,‘자신의 맥락’을 지워버리지 않는 일과 이길 수 있는 싸움의‘전선’을 구성하는데 동참하는 일이 상호 모순되지 않도록 하는 것.저는 이것이 제가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민해야 하는 섬세한 전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