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한국근현대사 4강]
한국현대사와 여성의 성
- 1970년대와 2000년대 자주국방의 의미와 남성성의 변화
오늘 갑자기
6강 모든 강의에 오시는 분들에게 선물을 주시겠다고
갑자기 선물발언을 하신 정희진 선생님!
아무런 의미 없어보이던 출석체크가 갑자기 중요해진 순간이었답니다. 야호!
어떤 선물일지는 모르지만 선생님 책에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선생님이 주시는 어떤 것도 다들 좋아 할 듯^^
이번주 강의에는 문학작품들이 소개가 많이 되었습니다.
한국 문인들이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설명해 주셨지요.
자세한 내용은 리아가 쓴 후기를 보며 확인해 봐요
리아의 후기를 위해 스크롤을 내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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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민우회 회원 리아
요즘은 사람의 사고력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력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이끌어내는 촉매제와 같다. 예전에는 사고력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확장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여러 사례를 접할수록, 개인의 노력에 의해 사고력이 확장될 수는 있지만, 확장의 구심점은 타고난 환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어도, 사유의 발판이 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성찰할 때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주변에서 관찰되는 사람들의 어떤 경향을 추출하여 그것을 이 시대의 거울로 단정짓는다. 하지만 누적된 표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전체 모집단을 가리킬 수는 없다는 뻔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망각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성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 역시 —물론 여성학이 아닌 다른 모든 학문에서도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종종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다. 여성의 탈각되어버린 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중산층 여성인가 중산층이 아닌 여성인가, 성판매 여성인가 성판매 여성이 아닌 여성인가? 왜 어떤 여성의 신화는 가시화되고 어떤 여성의 죽음은 은폐되는가?
정희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완전범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해, 명시적인 가해자는 없지만 구조적인 가해자는 존재하고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가령 서울역 앞의 노숙인이 죽었을 때 그것은 언론에 나오지 않는다. 성판매 여성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주민등록번호 자체가 없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학이 당연해보이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이라면,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가시화되지 않는 ‘완전범죄’에 대해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정희진의 10월 15일의 강의에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지만 ‘완전범죄’처럼 가시화되지 않은 영역, 기지촌이나 국방산업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방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정희진은, 우리나라에서 젠더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한미관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얼핏 생경한 언설일 수 있으나,우리나라 및 제국주의에 희생된 여러 나라에서 젠더가 소비된 방식을 고려했을 때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젠더는 국방, 기지산업과 맞물려 성애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70년대에는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이 기지 산업을 이용하여 달러를 벌어들였다.
전쟁과 국방은 언제나 물질적인 약탈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전쟁과 동맹,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서 반드시 따라나오는 것은 ‘성의 착취’다.흔히 우리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여성을 ‘뺏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과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약소국의 남성은 힘이 없어 여성을 빼앗겼는가? 주디스 버틀러의 <동맹 속의 섹스>에서는 남자가 강대국과 협상을 하여 여자를 대주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이 꼭 남성 간의 경합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탈리아가 미국에 파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패션이며,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파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석유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여성을 빼앗겼다’고 부르짖는 약소국의 남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포주’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문인들은 언제나 포주의 자의식보다는 피해자의 자의식을 내세워 ‘빼앗긴 영토’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이들이 말하는 영토 개념은 여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미군정 이후 우리가 공식적으로 ‘빼앗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우리는 여성 착취 사례를 스스로가 아닌 타자에 의한 것으로만 기억해왔다. 『날개』, 『은마는 오지 않는다』, 『분지』, 『금강』, 『뺏벌』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분지』의 경우 ‘반미’라는 남성적 자의식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분지』는 한국인 남자 주인공이 미군의 엄마를 강간하는 망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슈가 되었던 것은 ‘미군’의 엄마를 건드렸기 때문이지, 미군의 ‘엄마’를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국방 관계에서 젠더의 개념은 이러한 방식으로 탈각된다. 뭇 남성들은 스스로가 타자의 위치에서 싸우기보다는 강자를 욕망하는 방향을 택했다.
페미니즘이 점점 어려워지는 큰 이유 중 하나가, 계급 문제가 젠더 문제와 섞이게 되는 것이다. 가령 엘리트 여성과 엘리트가 아닌 남성이 있을 때, 그 남성은 자신과 그 여자의 차이를 젠더 차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계급 차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여성 내부의 계급 차와 남성 내부의 계급 차가 남녀 차이보다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여성 해방은 점점 더 어려운 단계에 봉착하게 된다. 전체 여성이나 전체 남성을 아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사고력’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한 표본들이 어떤 구심점을 토대로 확장되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가시화되는 것과 가시화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비가시적인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때, 젠더에 대한 담론은 더욱 유의미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정희진의 한국근현대사 4강]
한국현대사와 여성의 성
- 1970년대와 2000년대 자주국방의 의미와 남성성의 변화
오늘 갑자기
6강 모든 강의에 오시는 분들에게 선물을 주시겠다고
갑자기 선물발언을 하신 정희진 선생님!
아무런 의미 없어보이던 출석체크가 갑자기 중요해진 순간이었답니다. 야호!
어떤 선물일지는 모르지만 선생님 책에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선생님이 주시는 어떤 것도 다들 좋아 할 듯^^
이번주 강의에는 문학작품들이 소개가 많이 되었습니다.
한국 문인들이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설명해 주셨지요.
자세한 내용은 리아가 쓴 후기를 보며 확인해 봐요
리아의 후기를 위해 스크롤을 내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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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민우회 회원 리아
요즘은 사람의 사고력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력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이끌어내는 촉매제와 같다. 예전에는 사고력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확장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여러 사례를 접할수록, 개인의 노력에 의해 사고력이 확장될 수는 있지만, 확장의 구심점은 타고난 환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어도, 사유의 발판이 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성찰할 때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주변에서 관찰되는 사람들의 어떤 경향을 추출하여 그것을 이 시대의 거울로 단정짓는다. 하지만 누적된 표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전체 모집단을 가리킬 수는 없다는 뻔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망각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성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 역시 —물론 여성학이 아닌 다른 모든 학문에서도 벌어지는 현상이지만— 종종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다. 여성의 탈각되어버린 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중산층 여성인가 중산층이 아닌 여성인가, 성판매 여성인가 성판매 여성이 아닌 여성인가? 왜 어떤 여성의 신화는 가시화되고 어떤 여성의 죽음은 은폐되는가?
정희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완전범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해, 명시적인 가해자는 없지만 구조적인 가해자는 존재하고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가령 서울역 앞의 노숙인이 죽었을 때 그것은 언론에 나오지 않는다. 성판매 여성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주민등록번호 자체가 없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학이 당연해보이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이라면,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가시화되지 않는 ‘완전범죄’에 대해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정희진의 10월 15일의 강의에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지만 ‘완전범죄’처럼 가시화되지 않은 영역, 기지촌이나 국방산업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방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정희진은, 우리나라에서 젠더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한미관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얼핏 생경한 언설일 수 있으나,우리나라 및 제국주의에 희생된 여러 나라에서 젠더가 소비된 방식을 고려했을 때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젠더는 국방, 기지산업과 맞물려 성애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70년대에는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이 기지 산업을 이용하여 달러를 벌어들였다.
전쟁과 국방은 언제나 물질적인 약탈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전쟁과 동맹,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서 반드시 따라나오는 것은 ‘성의 착취’다.흔히 우리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여성을 ‘뺏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과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약소국의 남성은 힘이 없어 여성을 빼앗겼는가? 주디스 버틀러의 <동맹 속의 섹스>에서는 남자가 강대국과 협상을 하여 여자를 대주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이 꼭 남성 간의 경합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탈리아가 미국에 파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패션이며,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파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석유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여성을 빼앗겼다’고 부르짖는 약소국의 남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포주’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문인들은 언제나 포주의 자의식보다는 피해자의 자의식을 내세워 ‘빼앗긴 영토’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이들이 말하는 영토 개념은 여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미군정 이후 우리가 공식적으로 ‘빼앗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우리는 여성 착취 사례를 스스로가 아닌 타자에 의한 것으로만 기억해왔다. 『날개』, 『은마는 오지 않는다』, 『분지』, 『금강』, 『뺏벌』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분지』의 경우 ‘반미’라는 남성적 자의식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분지』는 한국인 남자 주인공이 미군의 엄마를 강간하는 망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슈가 되었던 것은 ‘미군’의 엄마를 건드렸기 때문이지, 미군의 ‘엄마’를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국방 관계에서 젠더의 개념은 이러한 방식으로 탈각된다. 뭇 남성들은 스스로가 타자의 위치에서 싸우기보다는 강자를 욕망하는 방향을 택했다.
페미니즘이 점점 어려워지는 큰 이유 중 하나가, 계급 문제가 젠더 문제와 섞이게 되는 것이다. 가령 엘리트 여성과 엘리트가 아닌 남성이 있을 때, 그 남성은 자신과 그 여자의 차이를 젠더 차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계급 차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여성 내부의 계급 차와 남성 내부의 계급 차가 남녀 차이보다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여성 해방은 점점 더 어려운 단계에 봉착하게 된다. 전체 여성이나 전체 남성을 아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사고력’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한 표본들이 어떤 구심점을 토대로 확장되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가시화되는 것과 가시화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비가시적인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때, 젠더에 대한 담론은 더욱 유의미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