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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여성주의 바톤터치] 헤움의 머리 기르기

2014-09-18
조회수 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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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을 부탁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선뜻 수락했는데, 글을 쓰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마감이 지나서야 깨닫고 있는헤움입니다. 제 이름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하자면‘혜윰’이라는 토속어에서 따왔는데, ‘생각’이라는 뜻이에요. 평소에 생각 좀 하면서 살자는 다짐으로 지었어요.
 
 
저는 머리를 길러요. 처음 기르기 시작한 건 2006년인데, 당시 애인이었던 여성 친구와의 대화가 계기였어요.
 
“ **씨는 왜 머리가 짧아?” 
(평소에 반말로 얘기하는 사이인데 제 이름에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건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응? 난 이게 제일 잘 어울려.”
“뭐라고? 여태까지 그 머리밖에 해본 적이 없으면서 그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아오, 빡쳐!”
 
 
그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죠.
 
저는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잘 따라하는 아이였어요. 혼자 TV보다가도 애국가 나오면 일어서서 가슴에 손 얹고 있고, 조회시간에 차렷 자세하면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구요.이 사회에서 그렇게 살았더니 자연스럽게(아니 정확히 말하면 굉장히 인위적으로) 행동도 말투도 생각도 보통의 남성이 되어 있었던 거죠. 머리도 당연히 짧은 머리, 옷 입는 것도 아웃 오브 안중. ‘중요한 건 알맹이다, 내면이다’ 라고 생각을 했죠. 내면이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죠. 하지만 그걸로 외면에 신경쓰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했고 화장을 하거나 염색을 하는 사람들을 자본주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외모로 압박받지 않을 수 있는 남성의 편리함을 제 자신은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표현했지만, 짧은 머리는 내가 얼마나 남성적으로 외모를 신경쓰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어디서 그딴 말로 자기를 포장해?!”
 
(와… 이런 생각이 당시에는 모두 애인의 말이었어요. 저는 한참 뚱한 표정으로 그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화가 다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 제 생각을 써놓고 보니 그때 들었던 얘기네요.연애의 교육 효과란 정말…)
 
 
여성주의라는 게 말로 하면 얼마나 쉬워요?특히 저처럼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면 경계선의 이쪽에서,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한다, 성폭력에 반대한다, 성별구분에 반대한다, 안전하게 외치기만 하면 되는 걸요. 그걸 외치는 저는 짧은 머리에, 입만 열면 ‘현재 한국사회가’ 어쩌고 저쩌고.
말로 표현하지 말고 행동으로 표현해야 하죠, 사랑도 그렇고 진보도 그렇죠. 그녀는 안 좋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화장을 안 하고 다녀요, 모임에 나가서 썩는 말들에 문제제기도 일상으로 하고요, 그러니 나도 좀 뭔가 하래요. 그래서 그녀는 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줬어요. “치마를 입을래, 머리를 기를래?” 당시 제가 다닌 학교에 여성주의 실천으로 치마를 입고 다닌 남자애가 제가 아는 한에서 두 명 있었어요. 아, 그런데 그건 너무 어려워보였어요. 그에 비하면 머리 기르는 것쯤이야.
 
 
머리가 길어지니까 관리하는 게 힘들어지더라구요. 긴 머리를 감고 말리면서 왜 여성들이 외출준비에 오래 걸리는지 알게 되었죠.자연스럽게, 별 노력없이 보이는 긴 생머리가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도요. 그리고 머리가 길어지니까 제 몸짓, 손짓도 달라지더라구요.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게 되고 음식을 먹을 때 머리카락이 닿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어요. 여성에게 고유한 행동처럼 여겨지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신체 규율이나 옷차림으로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어요.
 
그런데 저는 처음 마음 먹을 때 머리를 자르라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아버지나 어머니는 ‘계집애처럼 그게 뭐냐’는 예측가능한 태클이었는데, 그 노골적인 말 대신 ‘너에게 안 어울린다’거나 ‘이외수 닮았다’는 건 좀 강력한 공격이었어요.거울을 보면 제 눈에도 긴 머리의 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어요. 이외수를 닮은 것 같기도 했어요. 그건 제가 너무 거칠게 길러서 그렇기도 하고, 긴 머리 남성이 흔하지 않아서 금세 닮은 것 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아름다움이라는 게 젠더에 따라서 어떻게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소수의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 ‘머릿결이 좋다’ 칭찬해줘서 점점 제 모습을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우습지만 저는 머리를 기르면서 제가 소수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대학원생인데 교수님이 “야~ 그 머리, 참 잘 어울린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 칭찬같기도 하면서도 혹시 반어법인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내가 권력이 약한 위치에 있으니까 상대방의 말에 신경이 쓰이게 되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상대방의 반응을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거든요.
 
지하철이나 버스에 타면 사람들이 한 번씩 나를 쳐다봐요. 개중에는 꽤 오랫동안 응시하는 사람도 있죠. ‘총각이우, 아가씨우?’ 물어보기도 하구요. 아이들은 혼란스러운 표정, 약간은 두려운 표정, 신기한 걸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절 봐요. 어른들의 반응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은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규정할 수 없을 때 엄청 불안한가 봐요. 아이들도 벌써 어린 나이에 세상을 젠더로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구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남자가 머리 기르는 것은 정말 여러 모로 아무 것도 아닌 실천인데 이 비루한 사회한테는 이것도 필요하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자주 보여서 익숙해지게 해야겠다!
 
 
세상에는 젠더로 구분하는 것들이 참 많아요.옷 디자인이 그래요. 그전까지 저는 무채색, 파란 색 계열만 좋아했어요. 소위 여자색으로 분류되는 건 못 견뎌했어요. 분홍색이나 빨강색, 노랑색을 옷으로 입는 건 상상도 못했죠.그런데 내 미적 취향이라는 게 나만의 취향이 아니고 남성 일반의 취향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일부러 그런 색상에 도전해보고 점점 익숙해졌고 지금은 귀여운 것, 분홍색을 좋아하고 있어요.하지만 왜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 옷은 다 여성용이고, 그렇게 여성의 특정한 형태에만 맞춰서 나오는 걸까요? 유니섹스에 기대했지만 그건 굉장히 무난한 디자인만 나오더라구요. 아, 취향을 강요하는 이런 무다양성의 사회같으니라구.
 
 
이렇게 여성주의는 내 주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되었습니다.급 마무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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