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스스로와 화해를 하는 것처럼
흔히 쓰는 말 중에‘생로병사’라는 말이 있다.누군가는 이 말이 인간의 삶 전체를 네 글자로 요약했다고도 한다.말 그대로 인간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유년 시절을 만성 두통과 잔병과 함께한 나로선 저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왜냐면 인간은 늙어서 병드는 것이 아니라,늙기 전에도 항상 아프기 때문이다.굳이 말하자면‘생병노사’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사람은 나이 먹어서 아프기도 하지만 어려서도 아프고,심지어 날 때부터 아픈 사람도 있다.아픔도 가지가지다.흔히 상상하는 중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만성 치통으로 밥한 번 제대로 먹어보는 게 소원인 사람,심리적 상처로 마음이 아파 드러누운 사람 등등.
겪는 고통,시기가 가지가지이니 반응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나는20대 초반에 꽤나 앓았던 적이 있었는데,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주변 사람을 굉장히 괴롭게 하는 환자였다.난폭하게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었지만,가족들이 내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일상에 차질을 빚게 한다거나,밑도 끝도 없이 감정적으로 매달려서 심리적으로 탈진하게 만든다거나,그렇게 괴롭혀 놓곤 정말 예리하게 상처 줄 말과 협박만 골라서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돌이켜 보면,오히려 이쪽이 더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을까 싶다.)그 유쾌하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그럼에도 가장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은 게 있다면,주변인에 대한 나의 저‘만행’이다.그 기억은 흔히 말하는 이불 뒤집어쓰고 발차기 오십 번쯤 날리는 기억이 되었고,나는 그 시간들을 마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 튼튼 페미니즘 강의, ‘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는다’는 아서 프랭크의 책‘몸의 증언’을 주제로 했다.책은 병고서사 연구의 대표작으로,한 마디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했다.아서 프랭크는 이 이야기를 사회학적으로 서술했으며,여기에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더했다.이 중에서도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서사적 측면에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라본 부분이었다.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이전의 나와 아픈 나 사이의 단절을 겪게 되고,때문에 강한 불확실성 앞에 놓이게 된다.즉 단선적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이 잔해를 벗어 날 수밖에 없다.이런 서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하는데,복원 서사와 혼돈 서사,탐구 서사가 있다.복원 서사가‘아픔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리라는 서사라면 탐구 서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서사다.혼돈 서사는 총체적 난국 속에서 스스로도 이해 못할 혼란을 표출하는 서사다.
이 세 종류의 서사에서 굳이 혼돈 서사를 마지막으로 소개한 이유는,그 서사가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스스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부정,주변인에 대한 무한한 의존,아이들 것이나 다름없이 툭툭 뱉어지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 등.나 스스로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기억에 대해 아서 프랭크는‘그럴 수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아픔을 이겨낼 사회적 자원도,정서적 자원도 소진된 사람에게 어떤 다른 선택권이 있겠느냐며.물론 그 역시도 이 상태가 결코 바람직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하지만,우리는 그 사람의 경험을 존중하고 혼돈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당시 아픔을 겪던 나를 되돌아보았다.사회적 자원도 고갈되고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만 느껴졌던 시간,어쩌면 내게 있어 그런 반응이 최선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런 나 스스로를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때문에 강의를 듣는 게,마치 스스로와 화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전의 나를 돌아보고,이해해보고,그 경험과 감정을 소외시키지 않고 화해하는 일.그리고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혼란을 겪는 사람들 옆에 함께 앉아있고 싶다는 들었다.어쩌면 이것이 강의와 책이 바라고,말하고자 한 일이 아닐까 싶다.좋은 강연과 책 소개를 해주신 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 |
- '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는다' 강의평가 내용중 발췌
7월15일 저녁,시민 공간<나루>지하1층 교육장에서는<섹스화된 몸>의 저자이신 전혜은 쌤의 강의가 있었습니다.이날 강의는“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아서 프랭크의<몸의 증언: The Wounded Storyteller>책을 쉽게 풀어서깨알같은 그림과함께 설명을 들을 수 있던 자리였는데요
▲위 그림은 <몸의 증언> 85p에 있는 표 오류를 수정해주신 내용입니다.
책에 소개된 도식,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과 함께 계속해서 각자의‘몸’에 대한 생각, ‘아프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누군가’에 대한 이해를 시작할 수 있는 질문을 할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서문의 내용처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를 느끼게 해줬던 자리였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환자로서,사람들은 돌봄을 받는다.
그러나 스토리텔러로서,그들은 타인들을 돌본다.
아픈 사람들,그리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 역시 치유자일 수 있다.
그들의 상처는 그들의 이야기가 갖는 힘의 근원이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아픈 사람들은 자신들과 청자들 간에 공감의 유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유대는 이야기가 반복됨에 따라 확장된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공유된 경험의 원은 넓어진다.”
-아서 프랭크의<몸의 증언: The Wounded Storyteller>서문27p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 만큼 두 시간의 강의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졌었는데요. 아래 내용은 소중한 민우회원인 스머프가 강의를 듣고 감동해 자발적(!)으로 후기를 쓰겠다고 선언하고 술술술 써내려갔다는 후기내용입니다. 강의에 못오신 분들도 후기 읽어보시고 <몸의 증언>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스스로와 화해를 하는 것처럼
흔히 쓰는 말 중에‘생로병사’라는 말이 있다.누군가는 이 말이 인간의 삶 전체를 네 글자로 요약했다고도 한다.말 그대로 인간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유년 시절을 만성 두통과 잔병과 함께한 나로선 저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왜냐면 인간은 늙어서 병드는 것이 아니라,늙기 전에도 항상 아프기 때문이다.굳이 말하자면‘생병노사’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사람은 나이 먹어서 아프기도 하지만 어려서도 아프고,심지어 날 때부터 아픈 사람도 있다.아픔도 가지가지다.흔히 상상하는 중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만성 치통으로 밥한 번 제대로 먹어보는 게 소원인 사람,심리적 상처로 마음이 아파 드러누운 사람 등등.
겪는 고통,시기가 가지가지이니 반응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나는20대 초반에 꽤나 앓았던 적이 있었는데,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주변 사람을 굉장히 괴롭게 하는 환자였다.난폭하게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었지만,가족들이 내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일상에 차질을 빚게 한다거나,밑도 끝도 없이 감정적으로 매달려서 심리적으로 탈진하게 만든다거나,그렇게 괴롭혀 놓곤 정말 예리하게 상처 줄 말과 협박만 골라서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돌이켜 보면,오히려 이쪽이 더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을까 싶다.)그 유쾌하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그럼에도 가장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은 게 있다면,주변인에 대한 나의 저‘만행’이다.그 기억은 흔히 말하는 이불 뒤집어쓰고 발차기 오십 번쯤 날리는 기억이 되었고,나는 그 시간들을 마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 튼튼 페미니즘 강의, ‘아픈 몸은 침묵하지 않는다’는 아서 프랭크의 책‘몸의 증언’을 주제로 했다.책은 병고서사 연구의 대표작으로,한 마디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했다.아서 프랭크는 이 이야기를 사회학적으로 서술했으며,여기에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더했다.이 중에서도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서사적 측면에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라본 부분이었다.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이전의 나와 아픈 나 사이의 단절을 겪게 되고,때문에 강한 불확실성 앞에 놓이게 된다.즉 단선적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이 잔해를 벗어 날 수밖에 없다.이런 서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하는데,복원 서사와 혼돈 서사,탐구 서사가 있다.복원 서사가‘아픔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리라는 서사라면 탐구 서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서사다.혼돈 서사는 총체적 난국 속에서 스스로도 이해 못할 혼란을 표출하는 서사다.
이 세 종류의 서사에서 굳이 혼돈 서사를 마지막으로 소개한 이유는,그 서사가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스스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부정,주변인에 대한 무한한 의존,아이들 것이나 다름없이 툭툭 뱉어지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 등.나 스스로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기억에 대해 아서 프랭크는‘그럴 수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아픔을 이겨낼 사회적 자원도,정서적 자원도 소진된 사람에게 어떤 다른 선택권이 있겠느냐며.물론 그 역시도 이 상태가 결코 바람직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하지만,우리는 그 사람의 경험을 존중하고 혼돈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당시 아픔을 겪던 나를 되돌아보았다.사회적 자원도 고갈되고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만 느껴졌던 시간,어쩌면 내게 있어 그런 반응이 최선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런 나 스스로를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때문에 강의를 듣는 게,마치 스스로와 화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전의 나를 돌아보고,이해해보고,그 경험과 감정을 소외시키지 않고 화해하는 일.그리고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혼란을 겪는 사람들 옆에 함께 앉아있고 싶다는 들었다.어쩌면 이것이 강의와 책이 바라고,말하고자 한 일이 아닐까 싶다.좋은 강연과 책 소개를 해주신 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