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상 강간죄는 오랫동안 "폭행 또는 협박" 여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폭행·협박없는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기관의 성폭력 상담 사례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사례 총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는 71.4%(735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현실과 법이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현장 지원 단체들이 쓴 <릴레이 리포트>와 더불어,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를 발행합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 <성폭력인데 성폭력이 아니라고요?>는 6월 20일부터 3주간, 매주 화요일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을 겪은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고 피해자는 보호 받지 못하는 현행 법의 현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_J
“안녕하세요”하는 인사가 좋다. 내 일상이 안녕치 못해진 이후에도 웃는 얼굴로, 혹은 무심하게 주고 받는 안녕이라는 인사는 차가운 세상을 약간 더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를 준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안녕하다 말할 수 없는 지금, 나는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싫고 한국어가 듣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서구 세계로 잠깐 동안의 도피를 결심한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다. 명백한 거부에도 강간 피해를 당했으나 폭행이나 협박이 없다고 기소조차 되지 않은 강간 피해 생존자이고, 동시에 만취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되어 누구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못 한 준강간 피해 생존자다. 그러나 법적으로 나는 강간도 준강간도 인정받지 못 하게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아닐까? 성폭력의 피해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지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더 괴롭다.
낯선 장소에서 동의하지 않은 이와 맞이하는 아침의 불쾌함을 아는가? 나는 내가 마주한 상황을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술에 취한 채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앞뒤의 정황은 알 수 없다. 당신은 나체이며,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는 그때 그 낯선 이는 일상적인 것처럼 말을 걸며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겠다 한다. 그리곤 다시 허락 없이 당신의 몸을 만진다. 더 이상 행위가 진행되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당신의 거절의 말과 몸짓은 상대방의 무력으로 제압된다. 그는 원하던 일이 끝나고 나자, 어쩌면 무해해 보일지도 모를 표정으로 태연하게 다시 말을 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은 그 간극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아는가? 나는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으로 한숨만 나왔다.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대개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성희롱, 그리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는 다르다. 명백하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사는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태어나서 겪어본 경험 중, 타인에 의해 내가 사라지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강간’은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폭력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얻어맞거나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극심한 무력감과 함께 공포 속에 있었다. 최선을 다한 저항과 거듭된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는 상대방의 행위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나를 제압했다. 마법이 풀리고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때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현행법상 강간은 ‘폭행과 협박으로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겪은 일은 무엇인가? 폭행과 협박이 없었으니 화간인가? 거절은 있었으나 동의는 하지않는 조금 독특한 형태의 성관계였는가? 전혀.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할 것에 절대로 동의한 바 없다. 내가 당한 일은 명백한 강간이었지만, 법원은 그 행위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일어난 성폭력은 어떠한가? 나는 클럽 안에서 낯선 남성과 술을 한 잔 마신 이후부터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나의 사라진 시간은 혼자 서 있지도 걷지도 못하고 소지품 하나 없이 낯선 남성들에 의해 낯선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담긴 CCTV와, 몇 시간을 나를 찾아 헤매고 있던 친구들의 메시지, 방 안의 성적인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으로 성폭력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내가 술에 취해 항거불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피해를 당한 나의 호소보다 조사나 법정진술 때마다 말을 바꾸던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현행법상 준강간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항거불능이어도 성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기본값인가?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해 발생한 성폭력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나의 성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법원은 내게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없었던 것처럼 판단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지금 나의 고통은 누구로 인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해자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거절도 동의였을 수 있다며 가해자를 연민으로 끌어안은 이 법의 무책임함인지… 결국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었음에도 내가 피해자다움에 맞서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는 할까? 어떤 말과 몸짓으로 어떻게 저항했고 가해자가 그 저항을 어떻게 제압하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웠는지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사관에게 하나하나 ‘상상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는 일의 지난함을 알까? '피해자다움'을 누구보다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법적 인정을 위해 나의 무결함을 증명해야 했을 때 느낀 분노와 회의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법’을 다루는 이들이 편견으로 바라볼까봐 매니큐어를 지우고 단정해보이기 위해 머리를 염색하며 느꼈던 그 수치심을 알까? 거듭 납득할 수 없는 결과에 항소나 재정 신청을 요구하면서도 혹여나 무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 무엇과 싸웠던 걸까? 내 싸움의 대상은 가해자 개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사회는 동의할 수 없었을 때, 저항했을 때 성폭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호소를 외면했다. 귀찮아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는 가해자의 말을 더 감싸안으며 방어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가해자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떻게 다시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본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 기대를 한다면,그것은 ‘동의없는 성적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사실이 법과사회에 자리잡는 것이 아닐까? 누구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허락 없이 수단화, 도구화할 수 없다. 폭행, 협박뿐 아니라 무력 행사가 있건 없건, 적극적 동의가 없었다면 합의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동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그 동의는 효력이 없다.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제야 사회에 인식되기 시작했듯이 ‘동의없는 강간’ 또한 법과 사회에서 당연히 통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결과에 순응할 수 없고, 순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로 인정받지 못한 그날의 일을 나는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까? 피해자라는 허울 뿐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더 했어야 할까? 혹시 성폭력의 판단기준이 ‘동의없는 성적행위’였다면 그 결과가 달라졌을까? 나는 아직도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름을 모른다.
[글쓴이 소개]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의 피해 당사자로, 준강간과 강간을 동시에 경험했으나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 했다. 사법부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성폭력피해 생존자'로서 정체화하여, 그 경험을 알리고 다른 피해자에게 연대하며 성평등한 세상을 쟁취하고자 한다.
형법상 강간죄는 오랫동안 "폭행 또는 협박" 여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폭행·협박없는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기관의 성폭력 상담 사례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사례 총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는 71.4%(735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현실과 법이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현장 지원 단체들이 쓴 <릴레이 리포트>와 더불어,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를 발행합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수기 <성폭력인데 성폭력이 아니라고요?>는 6월 20일부터 3주간, 매주 화요일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을 겪은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고 피해자는 보호 받지 못하는 현행 법의 현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_J
“안녕하세요”하는 인사가 좋다. 내 일상이 안녕치 못해진 이후에도 웃는 얼굴로, 혹은 무심하게 주고 받는 안녕이라는 인사는 차가운 세상을 약간 더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를 준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안녕하다 말할 수 없는 지금, 나는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싫고 한국어가 듣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서구 세계로 잠깐 동안의 도피를 결심한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다. 명백한 거부에도 강간 피해를 당했으나 폭행이나 협박이 없다고 기소조차 되지 않은 강간 피해 생존자이고, 동시에 만취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되어 누구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못 한 준강간 피해 생존자다. 그러나 법적으로 나는 강간도 준강간도 인정받지 못 하게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아닐까? 성폭력의 피해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지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더 괴롭다.
낯선 장소에서 동의하지 않은 이와 맞이하는 아침의 불쾌함을 아는가? 나는 내가 마주한 상황을 인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술에 취한 채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앞뒤의 정황은 알 수 없다. 당신은 나체이며,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는 그때 그 낯선 이는 일상적인 것처럼 말을 걸며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겠다 한다. 그리곤 다시 허락 없이 당신의 몸을 만진다. 더 이상 행위가 진행되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당신의 거절의 말과 몸짓은 상대방의 무력으로 제압된다. 그는 원하던 일이 끝나고 나자, 어쩌면 무해해 보일지도 모를 표정으로 태연하게 다시 말을 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은 그 간극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아는가? 나는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으로 한숨만 나왔다.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대개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성추행이나 성희롱, 그리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는 다르다. 명백하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사는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태어나서 겪어본 경험 중, 타인에 의해 내가 사라지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강간’은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폭력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얻어맞거나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극심한 무력감과 함께 공포 속에 있었다. 최선을 다한 저항과 거듭된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는 상대방의 행위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나를 제압했다. 마법이 풀리고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때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현행법상 강간은 ‘폭행과 협박으로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겪은 일은 무엇인가? 폭행과 협박이 없었으니 화간인가? 거절은 있었으나 동의는 하지않는 조금 독특한 형태의 성관계였는가? 전혀.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할 것에 절대로 동의한 바 없다. 내가 당한 일은 명백한 강간이었지만, 법원은 그 행위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일어난 성폭력은 어떠한가? 나는 클럽 안에서 낯선 남성과 술을 한 잔 마신 이후부터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나의 사라진 시간은 혼자 서 있지도 걷지도 못하고 소지품 하나 없이 낯선 남성들에 의해 낯선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담긴 CCTV와, 몇 시간을 나를 찾아 헤매고 있던 친구들의 메시지, 방 안의 성적인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으로 성폭력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내가 술에 취해 항거불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피해를 당한 나의 호소보다 조사나 법정진술 때마다 말을 바꾸던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현행법상 준강간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타인을 간음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항거불능이어도 성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기본값인가?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해 발생한 성폭력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나의 성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법원은 내게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없었던 것처럼 판단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지금 나의 고통은 누구로 인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해자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거절도 동의였을 수 있다며 가해자를 연민으로 끌어안은 이 법의 무책임함인지… 결국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었음에도 내가 피해자다움에 맞서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는 할까? 어떤 말과 몸짓으로 어떻게 저항했고 가해자가 그 저항을 어떻게 제압하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웠는지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사관에게 하나하나 ‘상상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는 일의 지난함을 알까? '피해자다움'을 누구보다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법적 인정을 위해 나의 무결함을 증명해야 했을 때 느낀 분노와 회의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법’을 다루는 이들이 편견으로 바라볼까봐 매니큐어를 지우고 단정해보이기 위해 머리를 염색하며 느꼈던 그 수치심을 알까? 거듭 납득할 수 없는 결과에 항소나 재정 신청을 요구하면서도 혹여나 무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대체 무엇과 싸웠던 걸까? 내 싸움의 대상은 가해자 개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사회는 동의할 수 없었을 때, 저항했을 때 성폭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호소를 외면했다. 귀찮아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는 가해자의 말을 더 감싸안으며 방어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가해자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떻게 다시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본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 기대를 한다면,그것은 ‘동의없는 성적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사실이 법과사회에 자리잡는 것이 아닐까? 누구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허락 없이 수단화, 도구화할 수 없다. 폭행, 협박뿐 아니라 무력 행사가 있건 없건, 적극적 동의가 없었다면 합의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동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그 동의는 효력이 없다.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제야 사회에 인식되기 시작했듯이 ‘동의없는 강간’ 또한 법과 사회에서 당연히 통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결과에 순응할 수 없고, 순응하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로 인정받지 못한 그날의 일을 나는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까? 피해자라는 허울 뿐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더 했어야 할까? 혹시 성폭력의 판단기준이 ‘동의없는 성적행위’였다면 그 결과가 달라졌을까? 나는 아직도 그날 일어났던 일의 이름을 모른다.
[글쓴이 소개]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의 피해 당사자로, 준강간과 강간을 동시에 경험했으나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 했다. 사법부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성폭력피해 생존자'로서 정체화하여, 그 경험을 알리고 다른 피해자에게 연대하며 성평등한 세상을 쟁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