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

반성폭력[기자회견문] "위계와 관행이 키운 연극계 성폭력, 우리가 막을 내린다"(11/11)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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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위계와 관행이 키운 연극계 성폭력, 우리가 막을 내린다.”

 

2025년 11월 11일, 오늘 수원고등법원은 연극계 원로배우 오OO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사건 당시 한 시립극단이 주최한 연극에 함께 출연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사회초년생으로, 계약직 인턴 배우였다. 반면 피고인은 59년 경력의 원로이자 특별 초빙된 주연배우였다.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세탁기를 쓸 줄 몰라 빨래가 쌓였다.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피해자는 막내 단원으로서 선배에 대한 예의와 존중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회식 자리에서 성적 농담을 일삼고, 피해자에게 “여자로 느껴진다.” 등의 발언을 반복하며 결국 강제추행에 이르렀다.

 

연극계에서 ‘선배’, ‘선생님’으로 불리는 이들의 위계와 권력은 일상화된 문화였다. 학과 교수의 소개, 선배 연기자가 속한 극단, 연출가의 추천 등으로 이어지는 인맥과 평판 중심의 도제식 시스템 속에서, 성폭력 피해를 외부에 알리는 것은 곧 경력 단절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극단은 지방자치단체 소속이었음에도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고충상담 창구조차 없었다. 피해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극계의 구조적 문제는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2021년 10월, 피해자는 피고인이 모 OTT 작품을 통해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는 모습을 보며, 애써 외면해왔던 피해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연극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피해자는 더이상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사과를 요청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딸 같기도 하고”, “고맙고 애틋한 마음에”, “치기였다.”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합리화했다. 피해자는 결국 고소를 결심했다.

 

2024년 3월 15일,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과 주변 증언, 업계의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인정이나 반성 대신 항소를 택했다. 항소심에서 피고인 측은 사건 이후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피해자답지 않다’ 는 이유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했다. 심지어 피해자 주변인들의 문자메시지까지 끌어와 피해자를 공격했다. 재판은 사실상 ‘2차 가해의 연장전’이 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으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피고인 측 전략을 긍정하였다. 나아가 피해자가 피고인의 폭력을 공개함으로써 피고인에게 일어날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등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입장을 왜곡하고 이해 관계를 덧씌우며 모욕하는 행태를 보였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 진술과 상담 상황의 특이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담소 기록의 오류를 악용하는 피고인 측 변호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차후 성폭력 상담소 활동을 위축시키고 피해자 보호를 후퇴시킬 수 있는 판단을 서슴없이 공표했다.

 

‘진짜’ 피해자라면 피해 이후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다/한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의 논리다. '피해자다움'은 성폭력이 '피해자가 극도로 수치스러워해 마땅한 일'이라는 한국 사회의 오래된 통념과 무지에 근거한다. 그러나 실제 피해자들이 겪는 감정은 단일하지 않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 가해자와의 관계, 주변 환경 등에 따라 공포‧ 분노‧ 부정‧ 혼란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감정과 행동이 동반된다. ‘피해자다움’은 그 자체로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고, 사회적 판단을 왜곡하며, 법적 권리를 침해한다.

 

피고인 측은 재판 과정에서 확보한 피해자의 진술조서, 일기, 문자 등을 사설 진술분석 기관에 넘겨, ‘연극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일반인보다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피해 진술을 할 것이나, 청각‧촉각 등 접촉 감각에 대한 표현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사실을 왜곡‧과장했다는 황당한 주장이 담긴 분석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당 기관은 전문성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성범죄 사건을 이용하여 ‘피해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가해자 변호 시장화’의 한 축이다.

 

피고인은 일부 연극인들을 동원해 “원로 주연배우에게 캐스팅 권한은 없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는 연극계의 위계 문화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성폭력을 은폐해온 관행을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피해자가 ‘미투 운동에 경도되어 피해 사실을 과장했다’ 는 주장을 담은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는 피해자의 목소리뿐 아니라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통해 시작된 변화를 막고, 역행하려는 시도임이 명백하다.

 

피고 오OO은 최후 변론에서 “80년 인생이 가차 없이 무너졌다. 제 자리로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80년 인생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피고인 자신이다. 자신의 행동과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만이 피고인이 말한 ‘제 자리로 돌리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오랜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낸 피해자와 함께 싸워왔다.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유죄 여부를 넘어, 문화예술계의 위계와 관행이 성폭력을 용인하고 방조해왔음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냈고, 오늘의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더 크게 말하고, 더 넓게 연대할 것이다.

성폭력 없는 연극계를 위한 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모든 연극인이 존엄과 안전을 보장받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위계와 관행이 키운 연극계 성폭력,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막을 내린다.

 

 

2025년 11월 11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