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게, 까칠하지만은 않게

●여해(민우회 회원)

  나에게 여성주의란, 이론이기보다 생활정치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천달거리대(면생리대)를 쓰고, 맨얼굴로 다녀도 아무렇지 않고, 또 놀이처럼 화장을 하는, 가끔 하이힐을 신어도 상관없고, 편한 게 좋아서 운동화를 신는, 시스루룩도 입고 헐렁한 츄리닝도 입는, 채식을 하고 육식을 줄이는, 되도록 밥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적정량만 담는, 개인 컵을 가지고 다니는, 도시락을 싸먹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성욕을 마음껏 이야기하는, 스트레스의 원흉을 수다로 파헤치는, 일회용기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새싹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가족을 맺는, 나의 일상이다.

  그러면서도 매주 책을 읽고 빙 둘러앉아 이론공부를 함께 하는 것은, 그 또한 여성주의이자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민우회 활동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활동가’들도 ‘이론가’들의 대화는 못 알아듣고 공감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 저는 ‘결심’에 의해 여성주의를 접한 게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몸에 들어온 것 같아요. 몸이 변하니 여성주의 관련 이론이 쏙쏙 들어왔고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론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민우회 안에서는 불편한 지점이 있으면 이야기해 풀면 되지만, 우리 밖의 무엇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내공’은 필요하겠구나 느끼거든요.” 물론 활동가는 이론가여야 하고, 이론가는 활동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미묘한 문제/지점을 갈라내고 소신 있게 발언하는 ‘내공’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치열한 ‘공부’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는 이미 내가 숨 쉬기 위한 삶의 조건이다. 여성주의와 관련한 텍스트를 읽고 난상토론 세미나를 벌이는 이론공부가 그러하고, 3.8 세계여성의 날 여성대회, 수요집회, 선거투표독려운동, 여성/환경/인권영화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일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다.

  내가 여성주의자가 된 이유도 그렇다. 어린 시절, 명절 때 아빠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제일 늦게 밥을 먹고, 또 설거지도 하고, 전을 부치고, 손님에게 나르고, 찌개를 끓이고, 다른 밥상에 떨어져 밥을 먹었다. 그게 좀 이상하고 불편했다. 왜냐하면 아빠는 아빠 본가에 도착하면 유난히 거들먹거리며(나와 엄마를 무시하며) 잠만 자다 밥 먹으며 손님이 오면 웃고 떠들고 다시 잠을 잘 뿐이었기 때문이다. 첫 손자(나)가 딸이었다는 이유로, ‘수고했다’는 소리를 할머니께 듣지 못한 엄마의 회한도 누누이 들어왔다. 전교수석을 하고 무슨 상을 타오건 “계집아가 공부 잘 해 뭣하노. 시집 가불면 남의 식구 되고 그만인 걸. 우리 집안 기둥(남동생)이나 정신을 차려야 안 하겠나.”고 크게 독려 받지 못했다. 오히려 같이 공부하자고 남동생을 독려하는 일은 두고두고 칭찬을 받았던 것 같다. 이런 이상하고 불편한 경험들을 갖고 있다가, 여성주의를 접했을 때, 몸이 뜨겁게 반응했다. 아, 이거로구나. 그래서였구나. 내 문제를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고, 나 자신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 되면서도 답답했던 것 같다.

  내 문제에서 출발한 의문은 의외로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남의 구도가 대표적이고, 맥락이 유사한 차별과 억압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궁금해졌고, 여성주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불편한 점이 많이 생기고 예민해져 간다는 느낌은 들었다. 가족에게 말대답하는 쌈닭이란 소리도 듣고, 여자애가 다소곳할 줄을 모른다는 말과, '까칠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신기한 것은, 자기 신경에 거슬리면 어른들에게 대놓고 욕도 하는 내 동생은 '돌봐줘야 하는 아이'로 언제나 감싸졌다는 점이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피해의식'이란 말을 듣기 싫어서이다). 더 신기한 것은, 이렇게 '까칠한'(여성의 예민한 문제의식은 특히 이렇게 명명되는 것 같다) 존재들이 나 말고도 무수히 많았다는 점이고, 더욱 더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도 '까칠하지만은 않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양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존재하는 '여성주의자'이기에, 그러므로, '사이비' 여성주의자는 있을 수 없다. 다양한 생각과 취향, 습관,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까딱하면 부딪힐 일도 많다. 하지만, 다른 지점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갈등이란 게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 생겼다 하면, '응해 말하기'와 '공감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점이다. 최대한 경청하고 공감하여 아껴 말하는 태도가 공유되어 있다는 것. 물론 언제나, 일상 속에서도 실천되는 삶의 양식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여성주의적'(이라 이름 붙이고픈) 삶의 양식을 차근차근 몸에 기입해 가는 중이다. 아직 그 경계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처음 여성주의를 접하고 났을 때는 한국 남성 포비아가 생겼었다. 그냥 '남자'가 다 싫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문제의 원흉이겠지만, 그 구조를 그대로 체현해내는 개인 남성을 만나는 일조차 꺼려졌었다. 요즘, 마초/꼰대는 실로 이러한 존재구나라는 걸 체험하면서 다시 그 포비아가 고개를 쳐들고 있지만(물론 여자-마초/꼰대도 있다), 그럴수록 여성주의는 이야기되고 공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마이너(비주류)로서의 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의 문제가 아니라 곧 '나'의 문제라는 점을 직시했으면. 그런 '나'에게 힘을 실어주고 지지를 보내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라는 걸 깨달았으면.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지만 말이다.

+) '여성주의(페미니즘)' 대신 소외되고 차별/억압받는 존재들을 품는 대안적인 이름을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