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겐들 사회생활이 쉽겠느냐만, 요즘 유난히 밥벌이가 괴롭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완벽주의적이고 권위적인 상사와의 관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렇게까지 깨져야 할 만큼 무능한 인간인가’라며 자학하기도 하고 ‘확 때려치워 버릴까 보다’ 씩씩대기도 한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동료들과의 수다이다. 나의 일터는 문제의 ‘그 분’을 비롯해 구성원 대다수가 여성이고, 그 중에서도 내 또래들이 많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은 나 혼자만 직장 분위기와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는 안도감도 느끼고, 내가 당한 꾸지람이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도를 넘은 인신공격임을 확인받고 억울함이 좀 풀리기도 한다. 거기에다 동년배 여자로서 공감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상 얘기를 덧붙여 깔깔대다가 오징어 씹듯 스트레스를 질겅질겅 씹어 넘기며 남은 하루를 버틸 힘을 얻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돌덩이보다 무거워진 사무실 분위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한 성토가 절정에 달한 수다 시간에 내가 무심코 한 마디 했다. “그 분, 너무 남자 같지 않아요?”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나는 그 상사에게 내가 그동안 겪었던 가부장들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여자 동료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전혀 남자 같지 않은데요? 남자 상사는 그렇게 감정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남자 상사들이 더 다루기 쉬워요.” “게다가 독신인 여자 상사는 더 해요. 결혼을 해 봐야 인간관계가 넓어져 이해심이 생기는데, 혼자 사니까 일 밖에 모르고 성격도 까다롭고.”

  ‘그렇지만 여러분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여자 상사가 될 거잖아요!’라는 안타까운 마음은 목구멍에 걸려 말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상사가 여자라서 힘든 게 아닌데, 게다가 나이 든 비혼 여성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하는 건 끔찍이 싫은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괜히 남자 운운하는 바람에 다른 여성들이 이 사회를 살면서 내면화하게 된 성차별을 끄집어낸 건 아닌지 죄책감마저 들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성별 불문하고 여성 상사보다는 남성 상사와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든지, 여성 상사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더 큰 스트레스를 받고 여성 상사가 여성 부하의 승진을 오히려 가로막는다든지… 상사-부하 관계뿐만이 아니다. 동료 관계에서도 남성들은 경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형님 아우 하는 인맥을 만들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기를 잘 하지만, 여성들은 동지 의식이 약해 그런 끈끈한 유대관계를 잘 맺지 못 하고, 겉으로는 친하게 지내면서도 뒤에서는 시기한다고들 말한다.

  여성들이 서로 적대하고 괴롭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묻고 싶다. 남성이 동료나 부하 직원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해도 그것은 보통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는데, 왜 여성이 (특히 공적 영역에서) 부정적으로 행동하면 그게 너무도 손쉽게 여성 집단 전체의 문제로 여겨지는지를. 또한 묻고 싶다. 아직도 여성들 스스로조차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여자보다는 남자하고 일하는 게 편하다는 이야기를 너무 쉽게 입에 담는데, 그런 믿음이 여자들을 진짜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닌지를.

  나라고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늘 편했던 것은 아니다. 따돌림, 무시, 헛소문 같은 교묘하지만 파괴적인 수단으로 상처받기도 했고, 우정을 앞세운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기도 했다. 특히 여성이 성차별주의를 수호하는 모습을 보일 때, 예컨대 성폭력·가정폭력 사건에서 남자의 편을 들어 다른 여자를 비난할 때는 크게 분노했다. 여성운동 집단 안에서조차 100% 완벽하게 이상적인 자매애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여성에 대한 편견에 덜 물들고 여성들의 관계맺기 안에서 여전히 가능성을 보는 이유는 긍정적인 여성상과 여성 연대의 경험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성들이 일찍부터 다른 여성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행동하는 경험을 많이 한다면, 결혼 여부와 자녀 유무와 성적 지향 등등에 상관없이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좀 더 많이 부각된다면 어떨까? 적어도 다른 여성과 트러블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이 여자라서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안 돼, 남자라면 좀 더 다루기 쉬웠을 거야’라고 손쉽게 결론 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여자의 적을 여자로 만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지긋지긋한 사이클을 이제는 좀 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