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대회(ICAAP)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활동가들은 과연 정부가 적극적인 유치 및 개최 노력을 할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격년마다 개최되는 지역대회로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부관계자, 보건의료관계자, NGO활동가, 감염인 당사자들이 모여 에이즈와 연관된 다양한 이슈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한국 정부는 에이즈 환자 존재 자체를 국내에서 인정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아닌 에이즈퇴치연맹에서 유치한 것이었다는 점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부는 대회 준비 기간 내내 비협조적이면서 동시에 에이즈 혐오적인 태도를 보였다. 애초 지원을 약속했던 예산을 삭감하고 한국도 모자라 해외의 HIV 감염인들까지 불러 와 소란스럽게 해야 하냐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대회(ICAAP)의 성공적 개최를 준비했던 것은 활동가들이었다. 한국 내 얼마 되지 않은 HIV/AIDS 활동가들은 커뮤니티 포럼 조직위에 들어 가서 못 하는 영어를 배워가며 감염인 소위원회, 청소년 소위원회, LGBT 소위원회, 성노동자 소위원회, 여성 소위원회 등을 만들고 조직하였다. 지역 조직책으로서 한국 활동가들은 열심히 활동하였고 ICAAP 커뮤니티 포럼 때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 외국 청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실제 ICAAP 대회에서 한국 활동가들은 주역이었다.

  그러나 ICAAP 대회 현장에서나마 한국 HIV/AIDS 감염인들이 존중받고 활동이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얼마 안 가 산산히 부서졌다. 27일 오후, 한국인 ICAAP 참가단은 에이즈 치료제 접근성을 심각하게 차단하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시위를 벡스코 회의장 내에서 진행하였다. 이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사전 ICAAP 조직위와도 약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간 ICAAP에서는 감염인 및 취약계층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다루었던 관례상 이러한 시위는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시위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체증하는 것이 발견되었고, 몸싸움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벡스코 내 경찰들이 달려들어 항의하는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소속 변호사 장서연씨를 연행하고 차에 태우자 해외 활동가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경찰차를 둘러쌌고 나중에 전경이 들이닥쳐 경찰차 주변 사람들을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해외 트랜스젠더, 감염인들의 옷이 벗겨졌고 다쳤으며 일부는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갑자기 벌어진 경찰 폭력 사태에 활동가들은 당황하였다. 감염인 및 취약계층(성소수자, 성노동자, 여성, 이주민 등)의 발언권과 표현의 자유는 ICAAP에서 제일 존중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이러한 ICAAP의 전통이나 관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끝내 마지막날까지 경찰 폭력 사태에 대해 한국 활동가들 및 해외 활동가들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하였다. ICAAP과 같은 국제대회장에서 경찰 폭력이 용인된다는 것은 더 이상 감염인 및 취약계층의 발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미 한국 정부는 ICAAP 대회 개막 이전 트랜스젠더 및 감염인 등 다수의 해외 활동가들에게 입국 거부 조치를 내렸으며 이에 대한 해외 활동가들의 불만이 상당하였다. 경찰 폭력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의미하였고, 해외 활동가들은 대회 보이콧을 포함한 강경한 목소리를 내었다.

  경찰 폭력 뿐만 아니라 이전 ICAAP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위대와 해외 활동가들에 대한 CCTV 촬영이나 채증 등에 대해서 해외 활동가들과 한국인 활동가들은 함께 공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 요구에서 ICAAP 조직위와 UNAIDS는 무기력하였다. ICAAP 조직위원장은 CCTV 자료 삭제를 요구하자 ‘한국에는 어디에나 CCTV가 있다’는 궁색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UNAIDS는 사건 발발 직후 성명서를 발표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었고 끝내 ICAAP이 끝날 때까지 한국 정부 및 경찰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ICAAP 중 외교부와 미팅하여 현재 대회 내 경찰 폭력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고 시위대의 입건을 취하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후 이 약속은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UNAIDS는 활동가들 앞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실제로는 대회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활동가들을 속였던 것이다.

  한국인 활동가들은 갑작스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활동가들은 수도 부족하였으며 오랜 ICAAP 준비로 지쳐 있었다. 그리고 실제 대회를 조직했던 주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회장에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인권이 유린되었다는 점에 괴로워하고 몸서리쳤다. 해외 활동가들과 한국인 활동가들은 밤새 함께 행동 계획을 짜고 입장을 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ICAAP 조직위와 UNAIDS를 압박할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러한 해외 활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정도 고립감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해외 활동가들은 대회가 끝나면 한국을 뜨면 그만이지만 한국인 활동가들은 남아서 이 문제에 대응하며 싸워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보도자료를 배포했음에도 국내 언론 어디에서도 국제대회장 경찰 폭력 사태에 관하여 다루지 않았다. 가장 감염인이 존중받길 원했던 공간에서 오히려 HIV/AIDS 감염인 문제는 소수의 문제였고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점을 처절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이었다. 해외 활동가들 역시 UNAIDS와 같은 국제 기구가 활동가들을 농락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CAAP 경찰 폭력 사태와 대응에서 빛났던 것은 해외 활동가들과 한국인 활동가들이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던 ‘연대’였다. 어떠한 제도적, 장치적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극한 상황에서도 활동가들이 서로 믿고 싸워나가고 있음은 몸으로 드러났다. 그냥 일반적이고 관료적인, 어쩌면 기만적인 국제회의장이 빛낸 것은 도리어 이러한 연대의 순간, 행동의 순간들이었다. 그런 순간에 우리, 한국인 활동가들과 감염인들은 거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