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집

먼지

여류시인 · 민중시인으로 불림. 여성신문사 초대주간.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활동. 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폭우로 불어난 계곡에서 실족사. 네이버 백과사전이 아는 만큼 그녀에 대해 알고 있을 뿐, 시인 고정희와 나 사이에는 별다른 사연이 없다. 처음 읽어 본 시의 제목이 「밥과 자본주의」였나? 제목이 너무 건전해서 시를 읽기도 전에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게 생각난다. 이런 정도이니 그녀에 대해 아는 척 하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 대해서라면 조금 할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로에서 고정희 생가가 있는 마을까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긴 직선길이다. 경상도 산촌을 굴러다니던 나에게 해남의 벌판은 무작정 넓게만 보였다. 가을볕은 따뜻하고 바람이 불면 익은 벼들이 온 벌판 가득히 일렁여서 넋을 놓고 걷고 또 걸었다. 입구에 큰 나무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몇 번을 두리번거리고도 시인의 집을 못 찾고 결국 대문도 없는 낡은 집에 무작정 들어가 길을 물었다. 개와 함께 졸음에 잠겨있던 할머니가 놀라지도 않고 깨신다. 할머니는 마루에서 일어서자마자 키를 반으로 푹 접더니 식물이 자랄 때만큼이나 천천히 앞장을 섰다.  

길을 물으면 대답 대신 그 길로 데려다주는 할머니를 따라 고정희의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생가는 마당 옆쪽에 따로 놓여있었다. 들어가서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대답과 함께 갓 담근 파김치, 열무김치, 배추김치에 참깨를 솔솔 뿌려 먹으라고 건네주신다.

그 집에는 물건들이 살고 있었다. 사방 벽에 가득한 책들. 문학전집들과 한쪽 벽을 다 가린 시집들, ‘빨간 책’ 들, 여성학 책들. 창 앞에 놓인 크고 단단한 나무 책상. 이제는 울리지 않는 구식 전화기. 도자기 안에 담긴 91년 날짜가 박힌 고지서들. 아직 쓰이지 않은 채 빛이 바랜 노트들. 방 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는 세 단어, 고행 청빈 묵상. 잘 낡은 나무 마루처럼 물건들은 고요히 세월을 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 고요함에 마음을 뺏겨 저절로 침묵하며 책장 쪽으로 다가섰는데.

그 집에 사는 물건들은 고정희의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영화가 담긴 비디오를 또 어떤 그녀는 자신의 첫 음반을 고정희의 집에 남겨놓았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은 새 책을 발간할 때마다 그녀의 책장을 계속 채워가고 있었고 약속이 담긴 핸드폰 줄이 놓여 있고 그리고 쪽지들.

‘올해도 당신 집에 왔습니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던가? 많은 말은 없었다. 사람은 죽고 한 칸의 집과 시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녀와의 대화에는 많은 설명대신 자기만이 아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너와 주고받은 말들, 때로는 침묵으로 많은 것을 나눈다고 믿고 있지만 그 말들의 틈 사이로 어느새 툭 떨어져버린 마음 몇 개가 있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지. 그래서 여행은 함께여도 혼자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빈 집은 누군가가 완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 다녀간 수많은 혼자만의 그녀들이 시간과 관계를 넘어 길게 손잡고 있는 곳이었다. 또 한명의 그녀가 쓴 편지가 알려준 대로 ‘당신 집 옥상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옥상 옆 감나무에 발간 홍시가 익고 있었다. 햇볕을 받으려 몸을 펴면서 나 역시 발간 빛 주머니처럼 익어갈 것을 생각했다. 수첩을 꺼내들고 그녀가 시집에서 베껴 썼다는 고정희의 시를 나는 그녀의 편지로부터 베껴 쓴다.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 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절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함과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고정희  

먼지 | 성폭력상담소 상근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