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평화’라는 단어가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스스로 평화롭지 못한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할 때마다, 제 집에서 불과 30km떨어진 어느 초등학교의 학생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사건을 접하면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 소식들을 들으면서, 미국 버지니아텍이라는 대학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고를 보면서, 그리고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내전들을 뉴스로 접하면서 ‘평화’란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제주도는 2005년 1월 정부에 의해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평화라는 단어를 비교적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선언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이 된 것은, 4.3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 전체 인구의 10분의1 이상(3만여명)이 ‘마녀사냥’식 폭력과 ‘초토화 작전’에 의해  생명을 잃은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끔찍한 국가폭력의 상처는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4.3 당시 불에 탔었던 초등학교들과 마을들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금도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학살현장들 속에서 그 상처는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것도 이런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요즘 제주도는 군사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해군기지, 공군기지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왜 새로운 해군기지가 필요한지? 왜 제주여야하는지?에 대해 제주 바깥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동안에, 제주에서는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주민동의를 얻어 추진하겠다던 해군과 제주도청은 전격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했습니다. 불과 8.8%의 응답자만이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상세하고 알고 있다고 한 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유치결정을 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모른다’라고 응답한 사람의 응답결과까지 여론조사 결과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와 관련해서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와 천주교 등 종교계에서 최소한 주민투표라도 거쳐서 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국방부와 제주도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전국적으로 ‘힘이 있어야 평화도 있다’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보수언론, 네티즌 모두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는데, 왜 제주도에서 반대하느냐? 지역이기주의 아니냐?”고 몰아붙입니다. 군비를 증강하자는 목소리가 크고 실제로 국방부의 계획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내의 군비증강 움직임은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과 맞물려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 해군기지는 군비증강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지스함, 유사시 항공모함으로 개조가능한 대형 상륙함(LPH)과 같은 함정들을 위해 제주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중국 등을 염두에 둔 기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군비증강이 우리가, 그리고 미래세대가 살아갈 한반도의 평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 함께 공유하고 고민할 시간도 없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는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해군기지가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가 일방적으로 홍보되고 있습니다. 미래보다는 당장의 경제적 이익이 힘을 가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평화’라는 가치도 경제적 이익과 연결되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 힘든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당장의 현안을 풀어나가는 것과 함께, 결국 ‘평화’라는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국가정책에 이르기까지 ‘평화’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고 평화를 교육하고 평화를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평화가 군비증강에 의해 지켜질 수 있는지, 아니면 ‘신뢰’와 ‘협력’에 의해 지켜질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눈앞의 경제적 이익보다도 미래세대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가치전환 운동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필요합니다. 제주에서 일어났던 국가폭력,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기억하고 그 경험들 속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명분을 내세운 행위들이 결국에는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파괴했던 경험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주의 경우에는 ‘평화의 섬’이라는 지위를 인정하고, 확고히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안이 되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는 단지 제주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날로 설 자리를 잃어가는 ‘평화’와 같은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평화를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제주에서는 천주교 신부님들이 지역을 순회하며 평화기도회를 열고 있고, 목사님들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평화백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실천들은 평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공감하기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단지 해군기지 하나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23일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연대성명을 내었습니다.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제주도 군사기지를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이었습니다. 이 성명서에서는 “제주도가 참된 평화의 공동체로 자리잡을 때 비로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참혹한 국가폭력을 딛고 일어선 제주가 동북아 평화의 상징이 되고, 평화의 가치를 널리 확산시킬 수 있는 구심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