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의 노동생각]
머리는 생머리, 립스틱은 밤색이어야?
이보경:: 여성노동센터 회원, 고용평등노동법연구위원회 여전사
요즘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누드캠프가 인기란다. '누드? 음란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캠프 관계자들은 누드와 음란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누드캠프라지만 옷을 벗는다는 것을 빼면 여느 캠프와 다를 것이 없단다. 캠프에 참가했던 10대는 '학교에선 옷차림으로 사람을 보지만 여기선 사람 그 자체를 만난다'고 말했다.
물론 국적, 문화, 모든 것은 다르지만 우리 사회도 '옷차림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옷차림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더 심하지 않을까? 거추장스러운 형식·격식을 많이 따지니까…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했던 실험이 생각난다. 고급스런 옷가게에 잘 차려 입은 여성이 들어섰을 때는 매장점원이 바로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설명하고 옷도 골라주고 하더니만, 수수한(?) 차림의 여성이 들어섰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을 뿐더러 질문에 대한 대꾸도 심드렁할 뿐이었다. 비싼 옷을 걸친 사람이면 자신들의 옷을 팔아줄 것이고 남대문표 보세옷을 입은 사람은 가격만 물어보고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괜한 시간낭비·체력낭비를 안하겠다는 것이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기분은…. 알죠??
어쨌든 의류매장점원의 눈에는 손님의 옷차림이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근거가 된다고 백번 양보해도, 의류매장점원도 아닌 사람들은 왜 옷차림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려 하는 것일까?
학생 때와는 달리 회사생활을 하면서는 옷차림으로 내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기 싫어도 하게끔 만든다. 사내에서도,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회사도 유니폼·정장을 입는 대신 자율복장제도를 시행한지 올해로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처음에 이 제도를 시행할 때는 면바지는 가능하지만 청바지는 안되고 쫄티도 안되고(물론 뱃살땜시 쫄티를 입을수도 없지만) 운동화도 안되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안된다는 제약이 참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된다는 제약들을 조금씩 무시하면서 편하게 옷을 입고 다니게 되었다. 가끔 눈치를 주지만 대놓고 그렇게 입지 말라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렇게 편하게 옷을 입고 다니던 내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전화와 메일로만 거래를 하던 업체를 갑작스럽게 방문해야 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화장기가 거의 없는 상태로 거래처 사람과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위아래로 한번 쭉~ 보더니만 '전화목소리는 예쁘시던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덜된 것은 알았지만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속이 뒤집히고 열 받는 것이 '일을 못한 것도, 실수한 것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다고, 내가 못생겼다고(개인적으로 못생겼다는 생각 전혀 안 함)… 내가 남자였어도 이렇게 말을 했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들었다. 그 후론 거래처와의 미팅뿐 아니라 사내에서 미팅, 교육 등이 있을 때는 나름대로 옷을 갖춰 입고 화장도 조금은 진하게 하게 되었다. 그렇게 불편한 차림으로 출근한 어느 날 기획부장이 앞으로는 그렇게 옷도 챙겨 입고 화장도 하고 다니란다. 나의 경력에 어울린다나 어쩐다나… 우리 사무실 남자 직원들은 과장급 또는 부장급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그래도 경력에 맞는 옷차림을 하라는 얘기는 듣지 않는다. 그러면서 왜 내게는 내 경력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아직 경력이 조금 많은 직원일 뿐, 관리자도 아닌데….
얼마 전 민우회로 사내의 비서채용규칙 때문에 열받은 여성이 상담 전화를 했었단다. 그 회사 사장이 만든 규칙이란 것이 머리는 긴 생머리이어야 하고, 1년 365일 치마만을 입어야 하는데 치마의 길이는 무릎에서 10센티를 올라가야 한단다. 또한 립스틱은 밤색이어야 하고, 글씨를 잘 써야 하고, 맘씨도 고와야 하고, 스타킹은 커피색, 치마를 입은 다리는 날씬해야 하고…. 치마를 잘 입고 다니지 않아서인지 처음 면접에서 제시했던 월급보다 적은 월급을 지급 받았다는 상담 사례를 모임에서 들으니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자기 평생 친구를 찾는다 해도 그렇게까지는 못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남자들은 아직까지도 여성들이 사무실의 꽃이 되어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그들에겐 청바지를 입고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일하는 여성들은 너무 드세보이고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을 것 같은 위험한 존재로 느껴지고, 그래서 여성들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남자들이 규정 지어 놓은 '여성다움'이란 미덕을 보여줘야만 능력 있는 여성이라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아직도 남자들의 시각에는 여성들은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닌 것인가?
사고의 전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고의 전환이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힘들어하는 이러한 일로 인해 나의 딸이 또 힘들어하고 지쳐 할 것이기에 남자들이 규정지어 놓은 '능력있는 여성'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드센 여자로 당당히 청바지를 입고 활기차게 뛰어보련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