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동자로서 여배우되기

 신연경(모란)
 

연출자로 진로를 잡고 영화 현장에서 일하면서 직접적·간접적으로 배우들을 만나게 된다. 평소, ‘훗날 내 작품의 캐릭터를 빛내줄 여배우가 누굴까, 누구와 함께 작업을 하면 신날까.’이런 상상을 하며 여배우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는 나이지만, 요즘에는 영화 스텝의 단순 노무자로서 배우 캐스팅 단계에서 필요한 배우 프로필과 이미지 정보를 얻기 위해 배우 개인 홈페이지를 검색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배우의 일상이 홈페이지를 통해 전략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충분히 알기에, 자신의 일상 자체도 관리 대상이 돼가는 배우들의 폭폭한 삶에 살짝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연예인 정도쯤으로만 생각했던 그녀들이 가수로서, 배우로서, 일에 대한 진지함과 자부심을 내비치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들이 나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지만 비슷한 곳을 향해갈,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므흣함을 느끼곤 했다. 혼신을 다해 온몸으로 삶을 느끼는 배우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 그 속에는 스타로서 한껏 뜨고픈 폼생폼사의 야망도 있고,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내고픈 담백한 이상도 있다. 각자 그 이상향의 방향과 높이는 다르지만, 각자 배우들은 그렇게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에 대해 다소 흠모의 마음을 품고 있던 나는 배우 장자연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종일 우울했다. 또한 이제껏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낭만적으로 생각해온 것을 반성하며, 냉정하게 그러한 생각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장자연씨의 개인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또다시 남의 삶을 엿보는 누리꾼으로서 죄의식의 무게를 더했다. 뒤늦게 장자연씨를 알게 되었지만, 그녀 역시 대부분의 배우들처럼 연기자로서 자신의 일을 아끼고 배우로서 존중받고 싶은 열망을 갖은 사람인 듯했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지평에서 손쉽게 가십거리로 다뤄지곤 하는 연예인, 그 중에서 여배우를 ‘노동자’로서 대하는 것은 얼마나 낯설고 생소한가? 현장에서 오랜 기간을 일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지켜본 배우들은 문화 산업 내 노동자들이 갖는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점점 줄어드는 캐스팅 기회 즉, 일자리 기회가 줄어듦으로 의미화되는 삶에 불안해하며, 다음 작품 계약이 성사되는지 여부에 노심초사하며, 다른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며 의류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꽤 알려진 배우임에도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등 그들 역시 나처럼 계속해서 일자리를 탐색해야만 하는 계약직의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르다면 배우라는 직업에서 커리어란, 숙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일정 시간의 거쳐 차곡 쌓이리라는 기대를 배반하는 것, 즉,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수무책인 나이듦과 육체적 매력 퇴색 과정에서 어떻게 버텨나갈 것인가를 실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것들이랄까.  

데뷔 과정조차도 상업화하는 TV의 무지막지한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현장에서 ‘쇼’이기보다는 현실이다. 이 판에 있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을 ‘선택되기’를 한없이 기다려야하는 사람으로 자조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특정 배우를 고르는 드라마․영화․CF 제작사와 그 아래에 위치한 매니지먼트 회사 그리고 그 아래 소속된 배우들. 다양한 계약 관계로 이뤄진 역학 속에서, 작은 배역 하나라도 어떻게든 ‘따내야 하는’ 배우들은 산업 내에서 계급적으로 최하위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위치에서 계약부터 작품에 대한 의견 피력까지 배우 개인의 의지와 의견이 반영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끊임없이 몸으로 평가받고 몸으로 환원되는 ‘젊은 여배우’들은 배우로서 좋은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것으로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는 별개로, 여자로서 성적 매력을 잃지 않는 것을 일종의 자기 계발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흔히들 ‘캐릭터’, ‘개성’은 개별 연예인을 평가하는 단어들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그 스펙트럼의 범위는 너무나 좁고 심지어 모순적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금의 융통성도 찾기 힘든 평가 체제 속에서 곡예를 벌이며, 데뷔를 위해, 특정 배역을 약속받기 위해, 성관계를 강요받고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소수 여배우에게 발생하는 사건처럼 이슈화되며, 그런 전근대적이고 병적인 관행들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말해지지만, 그러한 기사들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럼으로써 계속적으로 여배우를 ‘몸’으로 환원하며 공고히 해가는 ‘남성적’ 시각 구조에 대한 분노를 차지하더라도, 아마도 이러한 불편함의 기원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 그녀들을 일하는 ‘노동자’로서 위치시키고 싶은 내 욕망이 무시되고 있다는 불쾌감 때문인 듯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개별 연예인들은 기본적인 안전망도 갖지 못한다. 서바이벌 게임처럼 경쟁이 양식화된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연예인들은 문화 산업 내 어떤 직업군보다도 개별화되어 있다. 그 개별화된 주체들 중에서도 젊은 여자들이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은 조금 더 어렵다. 연대를 이야기하기 힘든 산업적 구조와 함께, 보수적인 성담론이 자리하는 한국에서, 여배우에게 적용되는 이중적 잣대는 가까운 동료에게조차 어려움을 말하는 것을 힘들게 하며 침묵을 강요한다. 장자연씨가 그녀 자신이 당한 부당한 일들을 토로하는 방식에서 보이는 열악함과, 목소리를 낼 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여자들이 온전한 자기로서 일어서는 엔터테이너로서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며, 동시에 산업 구조 내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보장받으며, 각자가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연대 할 수 있는 직업인으로서 배우를 꿈꾸는 것을 너무 작은 욕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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