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大 프로젝트 : 안경 필수!

물결(한국여성민우회 회원)

# 6년 동안 머물던 공간에서 걸어 나오기 : 미션1. 집 구하기

2008년 1월. 땅바닥은 아직 얼어있다. 저녁 6시 무렵, 깜깜하고 바람이 날카롭다. 공인중개사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가슴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손이 차가워진다. 아찔하다. 내 돈에 맞는 전세로 나온 집은 달랑 두 곳 뿐. 일단 그 두 곳을 본다. 선택의 폭이 좁으니 결정이 빨라져 좋다고 위로한다. 난생 처음, ‘혼자’ 살 집을 계약한다.

조건은 꽤 훌륭하다. 직장까지 걸어서 25분 남짓. 근처엔 낮은 산도 많고 아담한 산책로도 많다. 게다가 조용한 주택가. 그리 구석진 곳도 아니고 골목엔 가로등도 있어 밤길도 두려움을 줄 정도로 어둡진 않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반지하. 빛과 바람 없는 곳을 싫어하는 내게 반지하는 큰 문제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 6년 동안 머물던 공간에서 걸어 나오기 : 미션2. 이사하기

2008년 2월. 날이 화창하다. 이사를 한다. 머물던 곳에 남겨 놓는 것이 더 많다. 장롱과 화장대, 앨범은 두고 가기로 한다. 필요한 것만 골라 이사 트럭에 싣는다. 책꽂이, 서랍장, 상, 옷가지, 냉장고와 세탁기, 정수기, 냄비 몇 개, 아이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 두 개. 덕분에 이사는 순식간에 끝난다. 점심으로 비빔밥을 시켜 먹는다.

당장 오늘밤 덮고 잘 이불을 사야 한다. 그리고… 뭔가 허전하다. 소리! 지나치게 고요한 반지하. 평소엔 바보상자라 무시하던 텔레비전이 급하다. 당장 사야지. 이불과 텔레비전 그리고… 잠깐! 이게 지금 현실인지 싶다. 잠시 멍~. 다행히 곧 어둔 형광등으로 눈이 간다. 갈아야겠다. 내일은 내 생일이다. 집들이 겸 생일파티를 생각한다.

# 낯선 공간을 내 집으로 만들며 혼자 살아나가기

‘한 여자가 집을 갖는다는 것은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윤리적인 문제를 자신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일이다. … 인간다운 의식주, 생계를 위해 하는 일, 타인과의 교제, 자기 역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방바닥을 닦고 유리창을 닦는 일, 밥을 끓이는 일. 세속적인 조건 속에서 살기 위한 온갖 노력들의 경건함을 알게 된다.…’    전경린의 <엄마의 집> 중에서

처음으로 나만을 위해 밥을 하고, 방을 싹싹 훔쳐가며 닦고, 욕실과 부엌을 눈부시게 닦는다. 오묘한 감정들의 빛으로 맘이 일렁인다. 그러나 곧 나만을 위한 살림하기는 경건하지만 그걸 유지하기 위해선 의지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1. 출근 전 아침밥은 꼭 챙겨먹는다 : 우아하게 꼭 상에 차려먹는다.

싱크대에 서서 허겁지겁 물에 말아 먹지 않는다.

2. 퇴근 후 저녁밥도 꼭 챙겨먹는다 : 분식으로 때우지 않는다. 술 먼저 먹지 않는다.

이거 이거 1번보다 더 어렵다 ㅠ.ㅠ 특히 더운 날!

3. 무서워하지 않고 잠들기 : 나에겐 최고 난이도의 훈련! 첨엔 술을 마시고 잤으나,

어느 날 뱃살을 보며 평생의 잠자기 레이스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아니 된다 생각한다.

<1단계> 샤워나 마사지, 따신 차 한 잔으로 몸을 말랑하게 데우기.

<2단계> 누웠을 때 들리는 모든 소리는 누군가가 우리 집 창문 여는 소리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세뇌하기.

<3단계>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아이들의 숨소리와 체온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맘을  고요하게 만들기. <4단계> 스스로를 안젤리나 졸리라 생각하며 각종 스트레칭하기. 약간의 땀을 방출하여 몸을 나른하게 만든다.

<5단계> 배에 좀 무거운 베개를 올려놓고  복식호흡하기. 잡생각을 떨치고 호흡에 집중.

 <6단계> 생각나는 모든 여신들에게 집의 안전을 부탁하고 눈을 감는다.

 슬프게도 이러한 단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또 다른 비법을 많이 전수받아야 한다.

4. 날 지지해주고 건강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 민우회 소모임에 간다. 글로리아 스테이넘, 현경, 앨리스 워커, 베티 도슨, 정희진,

벨 훅스, 장차현실 등 다양한 여성학 책과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지속적인 만남과 유대로 삶의 상상력 기르기.

5. 반지하의 이 공간을 내가 ‘지금’, ‘머무는’ 곳으로 확실히 인식한다 : 필요한 가구를 사서 집에 구역을 만든다. 책 읽고 글 쓸 탁자-공부구역, 뜨개질하고 쉴 쇼파-휴식구역. 더 이상 이 집에 온 손님처럼 낯설어하며 곧 떠날 것 같이 굴면 곤란하다. 집에 있는 시간 동안 할 거리를 만들고, 그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 혼자 살아온 선배들에게 혼자 놀기의 비법을 전수받는다.

어렵지만 해내고 싶고, 해내야 하는 ‘혼자 살아나가기’. 약 8개월 동안, 5가지 남짓의 훈련(?)을 했다. 이번엔 멀리 내다보는 경제계획 세우기를 해 볼 생각이다. 앞서 혼자 산 여자 선배들이 없었다면 그러한 훈련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만도 많은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여기서 무서운 것은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겪어야 할 수많은 ‘옳지 않은’ 감정들이다. 6년 동안 머물던 관계에서 걸어 나와서 혼자 살아나가는,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 같이 한 내 ‘여성학 안경’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보내보자. 음…

‘안경아, 늘 반짝이게 닦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