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가능하다는 희망
                  

박봉(한국여성민우회 상근활동가)

누구에게나,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소신 있게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선뜻 믿지 않겠지만 나도 그렇다.
나의 말이 이해받을까, 너무 까칠해 보이진 않을까, 내 판단이 맞긴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게 아닐까,, 머리 어지럽게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나가버린다.
얼마 전에도 그럴 뻔 했다.

00기관이 개최하는 00워크샵에 참여하게 된 나는 주최측으로부터 참가신청서 작성을 요청받았다. 메일에 첨부된 참가신청서에는 ‘이 신청서는 모든 참가자 및 발표자에게 공개된다’라고 공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참가신청서에는 본인의 이름 및 경력, 관심분야을 비롯하여, 나이와 최종학력, 그리고 자택주소를 쓰도록 되어있었다.
나이, 최종학력, 자택주소란을 제외한 나머지 칸을 모두 채운 후, 채우지 못한 공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이와 최종학력, 그리고 자택주소를 모든 참가자들과 공유하는 것이 그 워크샵에서 필요한 일인가를 이리저리 따져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필요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럼 어쩌지? 반응가능한 세 가지 방법을 떠올려본다. 첫째, 모른척 그냥 채워서 보낸다. 둘째, 공란으로 보낸다. 셋째, 공란으로 보내되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를 택하는 게 가장 맘은 편할 거 같지만, 양심이 용납하기 조금 어렵다. 두 번째를 택하면, 왠지 다시 채우라는 답메일이 올 거 같다. 세 번째를 택하자니 행사에 참여하기도 전에 사소한 일에 곤두세우는 사람처럼 보일 거 같아 걱정이다. 잠시 고민. 그래 어쩌랴.. 기꺼이 불편해지기도 하는 마당에 불편해져야지.
나이와 최종학력은 공란, 그리고 자택주소란은 채웠다. 나이와 최종학력은 서로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란을 채우는 것은 나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설명과 자택주소란은 주최측 스탶에게는 필요할 수 있으므로 기재하기는 하나 그 용도로만 쓰기 바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밤에 답멜을 고심 끝에 보내고 출근해 메일함을 열었더니 벌써 답장이 와있다.  
“신청서를 작성하신 분 중에 나이와 최종학력, 자택주소란 기재와 공유가 불편하다는 의견이 있어 수정한다, 신청서 중 나이, 학력, 자택주소는 내부자료로만 사용하겠으며, 물론 이 3가지의 기재자체가 꺼려지시는 분은 안해도 무방하다, 경력과 관심분야 등만 공유하겠다, 바로 수정을 취할 수 있도록 피드백을 주신 참석자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사실 의외였다.
나의 의견을 충분히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답변도, 빠른 수정도 낯설었다. 일반적/관성적/관습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들이 다른 위치와 맥락에 서있는 누군가에게는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소외감을, 열외감을, 혹은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 혹은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잘못/실수이지만 의외로 잘못/실수의 인정은 쉽지 않다.
세련된 화법이 이런 결과를 불렀나? 은근슬쩍 흐뭇한 결과에 나의 공을 들이밀어 보지만, 그래도 이건 역시 의외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운 차별의 경험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반응 만으로 다른 사건으로, 의미로 구성되어 버렸다. 빠른 행위수정은 네 문제제기가 감사하다는 말이 ‘상투’가 아닌 진심임을 느끼게 했고 나에게 따뜻한 울림같은 것을 주었다. 아, 불편하면 말하면 되는 거였구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도 있는 거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거였구나.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이렇게 많은 여운을 주는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도 웃긴다.
난 의견을 이야기했지만 그다지 소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구나.
여성주의는 소통의 정치학이건만, 가끔 나는 협상이나 소통보다는 대립하기, 그리고 타자화하기를 더 익숙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을까? 물론 내 까칠한 성격 문제를 여성주의에다 뒤집어 씌우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를 이만큼 사람 만든 건 여성주의겠거니... 주제파악은 한다.

소통은 가능하다는 희망..그리고 소통으로 내가 한뼘 더 성장하고 풍성해질 수 있다는 믿음. 뻔한 듯 하지만 곧잘 잊어버리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