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소녀와 배운뇨자들의 민주주의

 

권김현영(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

 

 

 

“노래해, 노래해” 시위대를 진압하겠다는 공권력 앞에,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웃으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머쓱해진 경찰들은 “시위대 여러분 해산하십시오”라는 말을 “여학생 여러분 밤이 늦었으니 집에 돌아가세요”라고 바꾸어 말합니다. 조선일보는 82쿡 요리사이트 회원을 대상으로 고소를 했다가, 네티즌들의 실소를 사고 있습니다. 82쿡과 소울드레서의 2-30대 여성들은 자신을 “배운 뇨자”라고 지칭하며, 좌우의 이념이 아니라 생존과 존엄의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촛불 시위에서 가장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영웅담”은 한 유모차를 민 어머니의 행동이었습니다. 아이를 앞세우고 뭐하는 짓이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저는 이 행동을 보면서 이 어머니가 정말 한국의 “민주주의”를 “믿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대체 국민이 하지 말라는데 왜 하겠다는거야?” 라고 묻는 10대 소녀들과, 경찰이 결코 유모차 앞에서 물대포를 쏠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유모차 부대들, “다 먹고 살라고 하는 짓인데 먹는 문제만큼은 다들 누리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30대 배운뇨자들이 피우고 살려낸 촛불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똑한 놈은 열심히 하는 놈을 이길 수 없고. 열심히 하는 놈은 즐기는 놈을 이길 수 없다.”는 말 기억하시나요? 저는 이제 이 말이 댓구들이 좀 바뀌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촛불 시위 정국에서 보면, 물대포에 방패, 곤봉을 가진 경찰은 결국 질긴 시민들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 말씀처럼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듯이”, 힘은 결코 신념을 이긴 적이 없지요.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을 따지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시민들을 경이로워했습니다.

 

 

이번 촛불 시위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 하나만큼은 시민들의 마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아마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시민들 간의 권력의 평등한 배분과 개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실현”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물연대가 “노동자성”을 둘러싸고 정부와 그리고 화주들과 지난한 논쟁을 하는 사이, 기껏해야 소비자에 불과했던 이들이 소비의 정치경제학을 급진화시키는 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질 좋은 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70년대 보릿고개식 발상은, 이 투쟁을 “배부른 이들의 투정”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살아만 있게 해주면 감지덕지한 백성들을 상상했지만, 백성의 자리를 채운 것은 시민들이었던 겁니다. 광우병 정국은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환기했고,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예외상태”에 놓여있는 “보호받는 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정치적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초국적 글로벌 기업이 어떤 재료를 사서 어떻게 가공하는지를 점점 알 수 없게 만드는 상황에서, 정크 푸드를 아이들에게 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부모들은, 이제 안전한 고기는 점점 비싸지면서 선택의 폭이 좁아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무력해했습니다. 그리고 단체급식음식을 먹는 아이들과 군인들은 이 먹이사슬의 가장 첫 번째 실험대가 될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한 십대들은 “직접행동” 외에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죠. “우리보고 나라의 미래라고 하는데, 우리한테 그런 위험한 고기를 먹이려는 대통령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단상에 올라가서 얘기하던 아이들은 제 분에 못 이겨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런데 왜 군인도 아니고, 남자 고등학생들도 아니고, 여학생들이었을까요. 제가 거리에서 만난 몇몇 소녀들은 “동방신기” 팬클럽이었습니다. HOT 이후 10년이 넘도록 거대한 규모의 대중을 조직하고 동원하고 홍보하는 능력을 쌓아왔던 이 소녀들은 오빠부대를 만들어냈던 기획력을 바탕으로 초반 촛불을 점화시키는데 꽤 능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토피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학교와 대기업의 결탁에 부딪혀 번번히 실패를 경험했던 대안교육을 고민하던 지역공동체주의자들과 육식의 폐해를 얘기하며 공존과 상생을 자신이 먹고 사는 문제부터 실천해왔던 채식주의자들이 펴낸 책들의 소박하고도 급진적인 실천항목들이 이제 ‘대안’ 이자 ‘대항’담론이 되어 거리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장 현실적이 됩시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시다.“라는 구호를 아주 좋아하는데, 이번에 등장했던 ”저항이 대안이다“라는 구호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처리즘과 레이건노믹스의 시대에 창궐했던 ”대안은 없다“는 이야기에 대한 대항담론이 이제 거리에서 구호화된 장면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식탁위의 밥상까지 깊숙이 개입해오고 있는지, 유전자 조작 농산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식량주권이라는 거창한 개념부터 한미 FTA문제까지, 언론개혁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등등에 대해 지금처럼 사람들이 열심히 스스로 자기주도 학습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요.

 

버틀러와 스피박은 <누가 국민국가를 노래하는가-언어, 정치, 귀속>의 마지막에서 “혁명적 순간은 거짓 전망의 순간이자, 급진적 동맹파업을 위해서는 거짓된 미래의 전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삶의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바로 그런 전망을 열어준다면서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시위에서 등장한 새로운 여성 주체에게 붙여줄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지 새로운 주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틀을 최대한 유연화 하는 것입니다. 배운뇨자들과 촛불소녀는 그동안 지난하게 반복된 여성에 대한 타자적 호명(된장녀 같은)을 한 순간에 자기-호명을 통해 변화시켰습니다. 나를 인정해달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시민이다-라고 말하는 이들 중 그동안 비시민의 영역에 있었던 여자들이 많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무관심했던 것은 정치가 아니라 과잉이념화된 구호와 약속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헐벗은 삷과 주권적 삶의 구분은 광장에서 허물어졌습니다. 주권적 혹은 사법적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내용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 나를 시민에 포함시켜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시민이다. 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등장한 자기-결정적 주체들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자기-관리적·자기-결정적 주체형성이 규율이든 통제든 종속적 형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리를 찾게되는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현장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비판과 토론이 가능한 자리가 가능한 곳에 대한 “상상적인 것”, 그리고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하고 차이를 해체할 수 있는 “연대의 정치의 가능성”은 이제부터 자기 이야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대항 권력을 쌓고 그 허상의 권력을 배분하는 협치와 주류화의 틀이 아니라, 우연성에 기초한 사건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판이 벌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2MB 시대에 맞는 전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민우회에서 하고 있던 많은 운동들이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민우회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