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부터 '평등한 일·출산·양육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직장생활과 양육을 병행하는 남녀노동자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찾아가고자 했다. 그 한 과정으로 직장생활과 양육을 병행하는 남녀노동자를 대상으로 직장과 양육 양립의 어려움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에서 직장생활과 양육문제를 연결하여 생각할 때, '기혼여성이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요인'에 대해 무엇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질문하였는데, 남녀 응답자 모두 '장시간의 노동과 잦은 야근'을 두 번째 주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A : 아기를 낳고 나서 다니면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부담스럽죠. 늦게 끝나는 게. 대부분의 여성 동료들은 시간에 굉장히 많이 얽매여요, 저녁 퇴근시간에. 애들이 어릴수록 더하죠. 실질적으로 애들을 놀이방에 맡겼다가 찾아 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한테 맡겨도 가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면 시간을 많이 보게 되죠.
이미 직장생활과 양육을 병행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맡기고, 가사나 양육에 따르는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쪼개고 스케줄을 조정하는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직장생활과 양육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거나 가까운 친척에게 맡기게 되는데, 현실적으로 보육시설이나 친척 등에게 아이를 찾아오는 역할은 대부분 여성이 맡고 있다. 그리고 남성과 달리 양육과 관련된 노동, 가사 노동 등 집에 가면 "다른 야근"이 기다리고 있는 여성들에게 장시간의 노동과 잦은 야근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B : 막 어떤 경우에는 일이 있어서 오늘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으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안한 거예요. 혹시라도 6시 넘기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이런 생각.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는 것 때문에. 근데 또 그런 거 가지고 나 애 때문에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은 또 하기 싫고. 되게 그런 부분의 힘든 점이 있죠.
한편으로 노동시간이 길고 업무가 과중한 탓도 있지만 관행상으로 야근을 하는 경우도 많다. 특별히 업무가 남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앉아서 눈치 보느라고 개기고 있거나 눈치보고, 승진 그런 거 때문에 아무래도 좀 더 있어야 되고' 하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관행적으로 야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의 경우 여성들과 달리 가정에서의 "다른 야근"에 대한 부담감도 적고 아이 양육책임 부분에 있어서도 여성과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늦게까지 직장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남성에 비하여 여성들은 늦게까지 직장에 남아 있을 여유가 없다. 따라서 직장에 남아 있는 시간과 직장 혹은 업무 충성도가 비례한다고 인식하고 남아 있는 '절대적 시간'이 '능력'으로 인정되는 비합리적인 관행이 존재하는 현실로 인해 여성은 고과 등에서 불이익을 보게 되고, 상대적으로 이른 퇴근으로 인한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또 최근에 직장에서의 회식문화에 대한 문제제기 등 그 문화가 많이 변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야근뿐 아니라 저녁 시간에 주로 이루어지는 회식 등에 참석하는 것도 '충성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C : 아이 낳고 직장에 돌아와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일했어요. 그리고 승진도 했구요. 그런데, 팀장이 돼도 젊은 팀원들을 이끌 시간적 여유가 생기지 않더라구요. 예를 들어, 낮에 일하다 바빠서 차 한 잔을 같이 못하고, 밤에는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해서 같이 회식을 못하거나... 그러다 보니 제게 사람들이 팀장이 뭐 저래~라고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회식이 명목상으로는 직원들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수준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례 D의 말처럼 한편으로는 그 직원에 대한 평가로 직결되는 것이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이처럼 업무 수행 능력, 성과 등의 문제와 함께 이후 회식 자리, 늦게까지의 야근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도', '능력'을 평가하는 직장 문화는 '밤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퇴근 이후의 시간이 자유롭지 못한 여성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D : 일단은 일찍 퇴근해야 아이랑 같이 있고, 아이랑 같이 있어봐야 아이한테 어떤 부분이 손이 필요한지를 알 거 같거든요. 일단 회사의 업무가 그렇게 많다면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런 부분은 정말 고질적인 거 같애요.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너무 길고, 남자들 늦게 퇴근하고 이런 부분들. 남자들이 직장생활에서 가정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끔 돼야 될 거 같고.
위의 D의 말처럼, 남성들이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구조여야 아이와 시간도 보내게 되고 그러면서 양육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장시간의 노동은 현실적으로 직장에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을 수 없는 여성들에게도 부담이 되지만, 남성들 역시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됨으로써 가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을 줄이게 되는 요인이다. 이러한 현실은 남성이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가정에 참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라는 것이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사무실에 남아 있는 시간은 회사에 대한 '충성도'로, 그리도 '능력'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그간 '노동자'는 사실 가정에서 재생산을 위한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런 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지금까지 남성)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노동자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기업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수 있어야 했고, 또 그런 노동자를 전제로 기업에서의 모든 시스템이 구성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오랜 시간 회사에 머무를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는 '애사심이 부족하고', '일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고 또 많은 불이익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회사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이 남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또한 남성 역시 이제는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고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아버지 세대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상적인 노동자'를 가정에서의 재생산 역할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상정할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노동자는 '가족 책임이 있는' 노동자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전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하여 월차휴가 폐지, 연차휴가 축소, 생리휴가 무급화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정부안이 통과되었다. 이 정부안이 국회 본회를 통과한다면 법정 노동시간은 줄어들겠지만, 일정정도의 임금삭감 등을 감수하여야 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 단축은 삶의 패러다임의 변화, 즉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기본전제조건이다. 실질노동시간이 주 50시간에 육박하는 우리 사회는 법정노동시간단축뿐만이 아닌 실질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필요하다. 현재 주5일제에 대한 정부안이 여성의 사회참여확대와 남녀노동자의 삶의 질 제고, 이를 통한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과연 부합할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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