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활동가 다이어리_남는다는 것
[2020 상반기-함께가는 여성] 활동가 다이어리
남는다는 것
나는 남겨지는 것이 싫었다. 어릴 땐 가족들이 모두 일터와 학교로 사라지고 나만 남았던 방에, 쏟아지는 햇살이 싫었다. 남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모두가 가고 없는 교실에 남는다는 것이 싫었다. 오래달리기를 하면 가장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는데 저질체력에 턱 끝까지 차오른 숨보다 아무도 뛰고 있지 않는 운동장에 혼자 남는 것이 더 싫었다. 명절날 좁은 집에 친척들이 북적이는 게 싫었으면서, 막상 한꺼번에 사람들이 가고 나면 적막감이 너무 컸다. 함께 간 여행지에서 먼저 가는 이라도 있으면 먼저 가야한다는 그의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남은 나의 여행은 공허해졌다. 여자를 항구로 노래하는 것도 싫었지만, 떠나는 배와 남아있는 항구로 이분되는 관계의 역학에서 그게 내가 되는 건 더 싫었다. 자유로운 배를 다짐하며, 일상에서 나는 먼저 떠나는 것을 선택하려고 애를 썼다. 계획을 세워보기도 한다. 문제는 애를 쓰는데, 실행이 안 되는 거였다. 대부분 끝에 남기 일쑤였다. 그리곤 그렇게 그들을 보낼 때마다 ‘왜 남아서…’라는 후회를 했다.
오래도록 민우회에 남아 활동하다 보니, 민우회 활동을 정리하는 활동가의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기억에 담고 있다. 활동기간이 몇 달인 사람부터 스무 해가 넘는 사람들까지 각자의 활동 기간도, 활동을 정리하는 이유와 상황도 달랐다. 그래도 오래도록 함께 한 활동가들의 빈자리는 쉬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 다이어리에는 최근에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활동을 정리했던 몇몇의 활동가들을 보내야했던 나의 질척거림 혹은 후회, 아니면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회의 일정에 대한 것 뿐.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그와 나눈 문자만 봐도, 십 수 년을 함께 하면서 다정한 말 같은 건 나눠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처럼 투닥이며 회의를 하고 헤어진 게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숨이 멈춰버린 그를 보내며, 그 모든 게 미안함으로 새겨져 그가 미웠다. 문득 그의 공백이 낯설게 오는 순간,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쌓여 찾아가보면 결국엔 대단히 할 말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늘 하게 되는 말. 그냥, 함께 하던 아무 날이 그립다고, 하이가 아끼던 민우회 그리고 사람들, 내가 애써보겠다고… 괜히 여기에 남겨보아.
같은 팀인 적도 없지만 민우회에서 그저 한 날 한 시에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기댄 날들이 많았던, 민우회에서 나의 가장 오래된 벗. 내가 있었던 그 모든 순간의 민우회에 있었던 사람. 그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도 둘이 밥을 먹은 적이 한번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참 나답고, 그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애쓸 필요가 없어서 든든하기도 했던 것 같다. 연차가 쌓여갈수록 옆이 없어 외로워지던 그 순간에 그저 서로의 존재가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던 순간이 내게 있었다고. 17년간 한 곳을 판 우물이니 얼마나 깊을까. 달개비, 이제 너의 하늘이 더 넓어지길 그리고 평화롭고 따뜻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있을 때는 그저 함께했을 뿐 따뜻한 말 같은 건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가고 나니 공백이 너무 짙다. ‘왜 남아서…’ 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습관이 또 나대고 만다. 그러다 늘, 언제나 그랬듯, 다시 민우회의 일상을 돌아본다. 서너 시간씩 이어지다 끝내기를 반복하는 팽팽한 토론과 회의. 뜨거운 열기의 집회가 끝난 텅 빈 광장. 도떼기시장같은 바자회가 끝나고 비어버린 주차장. 호기심과 기대로 채워졌던 회원행사가 끝난 교육장. 채워졌다 사라지는 수많은 공간들.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수많은 일상 속에서 어쩌면 남는 것은 책임지는 일이라는 걸 이곳에서 배워간다.
민우회에서 17년을 보낸 지금, 남는 일에 다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민우회 대표를 맡는 일이다. 그렇게 대표 역할을 맡은 이후로 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내게 오는지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
혼자 남았던 방의 쏟아지던 햇살은 나의 두려움, 오래달리기는 남들과 상관없는 나의 레이스, 명절 끝 적막은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걸 안다. 누군가 떠난 자리는 새로운 사람의 공간이 되고, 다시 채워지는 그 누군가가 내게 남은 짙은 공백을 채워 주었다는 걸 안다. 나는 그들을 보내주기 위해 남았고, 새로운 이들을 만나기 위해 남았다. 그리고 실은 지금 민우회에서 나의 곁에 선 이들과 함께 남아 이 많은 것들에 대해 책임지고 싶어서 남았을 것이다. 두려움을 곁에 둔 레이스지만, 실은 그게 나의 진심이었던 거다.
나우(최진협)
여는 민우회 공동대표 /
안녕하세요. 지면으로나마 인사드립니다. 올해부터 3년간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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