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민우ing_'성적수치심' 요구하는 사회, 괜찮지 않습니다
[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ing
‘성적수치심’ 요구하는 사회, 괜찮지 않습니다
2021, 다시 ‘성적수치심’을 말하다
성폭력상담소는 2021년 〈성적수치심에 빨강카드를〉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설문조사(온라인)1)와 전화 인터뷰2)를 통해 ‘성적수치심’에 대한 여성들의 전반적 인식을 파악하고, 반성폭력 운동의 방향뿐 아니라 제도적 변화를 위한 구체적 언어를 찾고자 했다. 이를 기초자료로 온라인 캠페인, 토론회 개최, 소책자 제작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설문에 응한 이들 중 82.7%가 ‘‘‘성적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접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본 단어를 접한 경로로는 ‘성폭력 사건을 언급한 뉴스기사(89.4%)’, ‘성폭력 사건 재판 판결문(56.4%)’, ‘성폭력 사건과 관련된 일상의 대화 (44.2%)’ 순으로 나타났다(복수응답). 반면 “‘성적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일상에서 본인이 직접 사용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27.0%로, 단어를 실제 사용하는 경우는 10명 중 3명도 되지 않았다. 즉 ‘성적수치심’은 ‘대중화’된 단어이나, 여성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랑 지하철에서 (안내문에 적힌) ‘성적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금지합니다’를 봤다. 그런데 ‘성적수치심, 그게 뭐야?’, ‘너는 언제 수치스럽니?’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단어를 보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노다미, 30대, 전화인터뷰)
“처음 접한 건 기사다.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어는 아니다. 사건이 있을 때, 그리고 보도와 기사가 나오면, ‘성적수치심’이 같이 이야기 된다. 몇 년간 사회적으로 크게 보도된 성폭력 사건들이 많다 보니 그 단어에도 익숙해진 것 같다.” (김효주, 30대, 전화인터뷰)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공공적으로 쓰이는 단어라 생각하여 사용했지만 와 닿지 않는 용어라 내 상황을 언급하며 쓰는 일은 자주 없는 듯하다.” (익명, 설문조사)
같은 질문과 새로운 답
지난 2014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사건 대응 과정에서 축적된 사례를 중심으로 ‘성적수치심’ 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성폭력을 입증하는 대표적 조건이 되었는지, 여성들에게 특정 감정의 단어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짚어보고, 반성폭력 운동의 향후 방향을 모색하는 기회로서 〈성폭력 피해를 구성하는 '성적수치심',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제목의 전문가 포럼을 진행하였다. 당시 민우회는 “‘성적수치심’이 더 이상 피해자의 서사를 대변하는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폭력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7년이 지난 2021년은 어떨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미투(#MeToo) 운동을 거치면서, 여성들은 ‘성폭력’을 광장에서 증언하고 고발함으로써, 성폭력을 개인 간의 문제로 축소 은폐하는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를 요구했다. 2020년에는 텔레그램을 이용한 디지털성폭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디지털성폭력은 기존의 법체계 안에서 처벌이 미미했으며, 불법 동영상 유포 협박, 재가공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규정 자체가 없었다. 이에 따라 2020년 성폭력특별법 일부 조항이 개정3)되거나 신설4)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운동의 성과인 것은 분명하나 해당 법안에서 ‘성적수치심’은 핵심적으로 재인용되었다. 최근 ‘성적수치심’ 용어 변경에 대한 움직임5)도 있다. 하지만 ‘성적수치심’이라는 용어가 법에서 삭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계는 분명하다.
2021년 상담소의 설문조사와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성폭력 피해 이후의 감정에 대해서 “가해자와 방관하는 사람들을 향한, 부끄러움보다는 훨씬 강력하고 격한 감정”이라고 답했다. “내가 동등한 동료, 시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취급 받을 때, 인간적으로 존중받지 못했을 때”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이어 성폭력 피해 이후의 감정은 하나로 귀결될 수 없고, “1,000명의 피해자가 있다면 1,000개의 감정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 성폭력 사건을 경험한 인터뷰 참여자들은 ‘성적수치심’이 일종의 ‘업계(법조계) 전문용어’로서, 실제 나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성폭력 사건을 형사사건으로 처리하게 될 때 효율∙편의에 따라 요구되는 감정이라고 말해주었다.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성적수치심’이 가족∙학교∙포털∙언론∙의료기관 등 공적∙사적 영역을 통해 “학습된 감정”이며,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와 직장 같은 공적인 공간에서 인터뷰 참여자들이 겪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평등하고 공정해야 할 교육기관인 학교가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여성성을 조롱·규제하는 대표적 공간으로 기능함으로써 구성원들의 민주적 시민으로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감정과 관련된 63개의 단어를 제시하고 사건 이후 실제 느낀 감정이 그 중에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없다’거나 ‘모두’라고 답한 이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정해진 감정은 없다”,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처럼 여성들이 획일∙일원화된 기준을 거부하는 것은 성차별이 ‘여성다움’, ‘남성다움’과 같은 이분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다름을 틀린 것이 아닌 연대와 연결의 시작으로 여기는 여성들의 민주적 시민성은 ‘성폭력’에 대한 관점 변화를 넘어,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성적수치심, 괜찮지 않습니다
이미지 설명: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성적수치심 괜찮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로 퇴장을!’〉 토론회
지난 9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토론회 〈성적수치심 괜찮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로 퇴장을!’〉를 통해 “‘성적수치심’을 ‘성적불쾌감’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상황과 맥락이 충분히 반영되는 수사·재판 과정의 변화” 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동시에 법률에서 ‘성적수치심’의 삭제 여부를 충분히 숙고하는 동안, 최소한 “판결문에서 ‘성적수치심’이라는 용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권김현영(여성현실연구소 소장) 님은 성폭력을 구성하는 요건을 ‘성적수치심’에서 ‘성적불쾌감’으로 전환한다고 해도 또다시 하나의 감정으로 피해 이후의 감정을 규정하는 한계를 짚으며 “단일한 감정언어를 규범화 하는 것은 동일한 족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수치심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수치심을 느껴야 인정해준다는 법 언어에 저항하는 동시에, 공적인 장에서 성원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감정과 경험이 보이고 들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한국의 법조문과 판결문에 명시된 ‘성적수치심’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또 다른 토론자인 장다혜(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님은 강간을 제외한 다양한 성적 행위를 외국의 형법 체계에서는 ‘음란함’과 ‘외설’로 설명했고, 한국사회에서는 이를 ‘성적수치심’으로 적용해왔다고 말하였다. 또한 영국에서 2003년 성범죄법을 개정하여 ‘외설폭행’을 ‘성적폭행’으로 변경한 사례를 제시하며, 우리가 ‘성적수치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성적불쾌감’으로 변경하는 방향보다는 법적 요건을 ‘성적행위’로 명기하고, 수사재판 기관이 합리적 피해자 관점을 견지할 수 있는, 성인지감수성 축적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들을 기반으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성적수치심의 퇴장을 위한 활동들을 펼쳐갈 예정이다. 공적 개입과 개인들의 저항이 결합할 때, 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여성들에게 ‘성적수치심’을 강요하는 성차별적인 법과 국가의 규범을 페미니즘적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가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눈사람(최원진)
❚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1) 2021년 6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구글링크를 통해 진행. 총 503명 응답함.
2) 설문조사에 참여하고 추후 인터뷰 참여 의사표시를 한 이들 중 무작위 선정하여 진행. 총 36명 참여함.
3) 제14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①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18. 12. 18. 2020. 5. 19.>
4) 제14조의2(허위영상물 등의 반포등) ① 반포 등을 할 목적으로 사람의 얼굴∙신체 또는 음성을 대상으로 한 촬영물∙영상물 또는 음성물(이하 이 조에서 “영상물 등”이라 한다)을 영상물 등의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형태로 편집∙합성 또는 가공(이하 이 조에서 “편집 등”이라 한다)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본조 신설 2020. 3. 24.] 제14조의3(촬영물 등을 이용한 협박∙강요) ①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촬영물 또는 복제물(복제물의 복제물을 포함한다)을 이용하여 사람을 협박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본조 신설 2020. 5. 19.]
5) 검찰은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내부 일부 규칙(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에 있는 ‘성적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개정하였다. 또한 지난 1월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불법촬영(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성적 수치심을 ‘부끄러운 감정’만으로 협소하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6월 국회에서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성적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하는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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