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4월호 [마포나루에서] 나이듦에 대하여
나이듦에 대하여
주현정(주가이) ●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처장
할머니와의 이별
설 연휴 내내 나이는 못 속인다고 병이 나서 누워 있다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전주까지 운전해 갔다. 가는 내내 눈물을 참아가며 ... 할머니는 노환으로 고생하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마지막 뵈었던 할머니는 노환으로 입원 중이셨다. 할머니는 눈도 못 뜨시고 날 알아보지도 못하셨는데, 너무나 야위고 지치신 모습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평소 애정표현을 하시는 분은 아니셨지만 할머니는 날 참 많이 사랑해주셨다. 할머니 집에서 태어나 돌 즈음까지 컸을 뿐 아니라, 중학교 때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을 때도 중학생이라 전학이 안 되었던 나는 할머니 집에서 몇 달간 살았다. 서울에 와서도 방학 때 마다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내곤 했었다.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다가 몇 년 만에 아파서 누워 계신 모습을 뵈니 많이 죄송했다. 나는 할머니의 무나물무침과 “내새끼 왔는가.” 하며 잡아주시던 따뜻한 손을 좋아했다. 할머니 영정사진을 수줍게 끌어안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사랑해요.” 한 번도 못했던 말이다.
모두가 누구보다 장수하실 거라 믿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십년이 훌쩍 지났다. 그일은 당시의 내게는 정말 뜻밖의 일로 느껴졌고 그냥 한없이 슬프기만 한 일로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할머니의 죽음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할머니가 고령이신 관계로, 그리고 여러 사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사위가 되어버린 아빠는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에 사위라는 이름표를 달고 상복을 입으셨다. 그리고 똑같이 상복을 입은 엄마와 또 부쩍 연세 드신 삼촌, 숙모, 이모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추억과의 재회
이사를 앞두고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온 집안을 몇 주 동안 뒤집어 놓았다. 난 사실 보관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가 우리 남매의 성적표와 상장 등을 잘 보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왔고 그것들 안에서 찾게 되는 추억의 부스러기들을 나 또한 즐겼다. 그게 좋아서 나는 뭐든 잘 보관하는 편이다. 사실 ‘짐 최대한 줄이기’는 나에겐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일단 옷을 정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게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추억이 묻어 있는 것들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1년에 몇 차례씩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혹은 다른 이유로 적었던 일기들이 있다. 일 년에 열장이 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드문드문. 정말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버려야겠구나 하고 꺼내다 다시 펼쳐들고 앉는다. 울다가 웃다가 또는 화를 내다가 다시 고이 덮고 말았다. “안 되겠다 뜯어서 파일에 라도 넣어두자.”고 다짐한다.
이렇게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나는 많은 추억과 만났다. 당시엔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쓴 위문편지들에서 애틋하게 사랑했던 우리를 만났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아들들을 만났고, 열심히 고민하고 계획하며 살았던 나를 만났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애틋해 하고, 아들들을 어루만져주고, 내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즐거워했다. 무리해서 자동차를 사던 시절에 썼던 일기에는 무리한 지출에 대한 자기 합리화로 2010년까지 10년 탄다는 계획을 세워 크게 별 표까지 쳐놓았다. 지금까지 타고 있으니 그것이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어 흐뭇해진다. ㅎㅎ
이런 소소한 하나하나가 다시 추억으로 돌아온다.
나이 든다는 것
어렸을 적 생각에 ‘30살’이라는 나이는 참 크고 단단하게 느껴졌었던 같다. 굉장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었다. 그런데 내 나이 ‘서른’은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냥 여전히 철없는, 작고, 어린아이 같은 그런 ‘나’였다. 그런 30도 훌쩍 넘어 40도 지났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 나는 나이 들고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이 든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분명 나이 든다는 것에는 사랑하는 이들 또는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해져야만 함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만큼 추억의 깊이 또한 분명 깊어진다. 난 여전히 늘 그냥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있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는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주가이 ●
미니스커트와 하이힐로 스스로 나이듦을 거부하고 있는 뒷모습이 예쁜(?) 주가이. 사실 재미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재밌게 써보려 했는데, 역시 재밌게 쓰기 어려운 주제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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