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마지막 상영 : 막이 내리다
막이 내리다.
아마 저는 한국에서 이 표현을 별다른 설명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막 도입되기 직전에 극장을 찾기 시작했으니까요. 그 때는 영화가 시작될 때 블라인드처럼 스크린을 가린 막이 올라가고 끝나면 내려가길 반복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였죠. 어차피 영화가 끝나면 암전된 스크린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왜 굳이 가리는 걸까. 이유가 있긴 있었을 것입니다. 스크린을 보호해 더 오래쓰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죠. 찾아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아 여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생각이 바뀐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마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자기는 엔딩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영화가 끝나도 캐릭터들의 삶은 계속 흘러갈 텐데 마지막이라는 게 어디 있냐고. 특히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그런 감정을 강하게 느낀 것 같아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신애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뒤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거든요. 이어질 캐릭터의 삶을 앞에 둔 채, 이제 나의 일은 끝났으니 떠나겠다는 것처럼요.
이후로 막을 내리는 것은 제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겠지만 영화는 끝났음을 알리는 행위. 관객들에게 이제는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야됨을 알리는 신호. 우리는 극장 밖을 나서서 그 곳을 떠나겠지만 그것이 마지막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려진 막 뒤에서, 우리의 기억 뒷편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캐릭터들은 계속 숨을 쉬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영향을 미치겠죠.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기분이 좋습니다. 외롭지가 않죠.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니 우리는 여전히 함께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마치 먼 나라에 그들을 보내둔 느낌이 듭니다.
2014년 한 활동가의 제안으로 <스머프의 영화관>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제 이름을 걸고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는 코너였기에 제게는 매우 각별한 공간이었습니다. 3년이 넘는 시간,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제가 했던 생각과 느꼈던 감정들은 고스란히 그 글들에 기록으로 담겼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저는 일기를 썼고 편지를 부쳤으며 때로는 대자보를 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기 마련이죠. 아쉽지만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감정이 듭니다. 마치 졸업의 순간처럼요. 하지만 섭섭한 표정 보다는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제가 떠난 자리에서 누군가 다른 글을 쓰며 이야기를 이어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남긴 글은 그 곳에 남아 또 다른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필요한 순간에 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도록요. 혹은 이미 누군가에게 전달된 제 이야기들이 그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막 뒤에서 저는 계속해서 쓰고 이야기 하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계속해서 함께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손을 맞잡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글쓴이로서 첫발을 내딛을 소중한 기회를 제게 준 한국여성민우회의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막을 내리겠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그리고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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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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