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콘텐츠 어디까지 봤어요?] 소녀들은 용감하다, <힐다(HILDA)>
페미니즘 콘텐츠 어디까지 봤어요? ③
: 소녀들은 용감하다, <힐다(HILDA)> 글 / 정세이 |
어릴 적 나는 부모님이 사준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고, 친척이 선물해준 마론 인형으로 소꿉놀이를 즐겨 했다. 아기를 등에 업고 집안일을 하는 엄마와 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역할을 각각 여자 인형, 남자 인형에게 부여하며 놀았고, 종이 인형 속의 수영복이나 속옷을 걸친 여자아이에게 화려한 의상을 갈아입히며 즐거워했다.
가끔 집 안에 흩어져 있던 레고 조각으로 집이나 자동차를 만들며 놀았지만 그건 오빠의 장난감이었고, 아파트 단지 근처 밭에서 개구리나 잠자리를 잡으며 뛰어 놀던 것도 오빠와 오빠 친구들을 따라 나갔을 때뿐이었다. 부모님은 오빠가 아닌 나에게만 어디서나 무릎을 꼭 붙이고 조신하게 앉으라 말씀하셨고, 식사할 때 입을 가리고 먹으라고 가르치셨다. 몸을 흔들지 말고 꼿꼿이 걸으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여)동생이니까’ 오빠에게 양보해야 했고 오빠와 말다툼을 해도 부모님은 종종 나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했다. 장난기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던 나는 그렇게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학교 입학 후 쉬는 시간의 운동장은 남학생들의 전유물일 때가 많았다. 선생님들은 여학생들에게 드넓은 운동장을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더 활동적이 되라고 얘기해주지 않았다. 축구, 농구, 야구 등을 접할 일이 많지 않았고 기껏해야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피구 혹은 발야구가 전부였다. 한정적인 공간에서 고무줄놀이와 땅따먹기를 하거나 교실 뒤쪽 바닥에 둘러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 ‘여학생들의 놀이’였다. 학급 반장으로 나서는 것은 대부분 남자아이였고 학생 번호도 남학생부터 앞번호를 받는 식이었다. 그 모든 것이 여학생을 ‘조신하고 얌전하고 착하고 말 잘 듣고 다소곳하며 먼저 나서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는 데 뒷받침하는 요소들이었다.
좋아했던 영상 매체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들은 디즈니의 <인어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였고, 좀 더 커서는 <세일러문>, <웨딩피치> 등이었다. 한결같이 여자 주인공을 구해주는 남자 주인공(이를테면 왕자)이 있었고 그와 사랑을 이뤄야 행복해지는 결말이었다. <세일러문>, <웨딩피치> 속 여자 주인공들은 직접 악당들과 싸우긴 했지만 그 전에 꼭 변신을 해야 했고, 메이크업을 더 짙게 하고 더 짧은 치마로 환복하거나 아예 웨딩드레스로 갈아입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마치고서야 결투를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 불편한 복장을 하고 싸운다는 게 어이없지만, 그땐 예뻐지는 여자 주인공들을 보며 환상을 갖게 되었다. 여자 주인공의 성공 혹은 행복은 남자 주인공이 있음으로 완성되었고, 남자 주인공의 보호나 사랑을 받으며 해피엔딩을 맞는 스토리가 대부분이었다.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몸을 움츠리는 것이 여성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페미니즘에 관해 점차 알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끼게 된 것은 아동, 청소년 시기의 페미니즘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익히며 서로의 관계에 적용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의식 변화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힐다>는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언제나 거침없이 탐험을 즐기는 주인공 여자아이 힐다는 엄마와 함께 숲속에 산다. 힐다 가족은 집 주변에 살던 작은 엘프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밟아버리는 바람에 엘프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힐다가 엘프 왕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통해 화해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힐다 가족은 자신들의 거처를 보지 못한 채 밟고 지나간 거인으로 인해 집이 산산조각 나게 되고, 결국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다. 처음에 힐다는 건물과 차와 사람이 많은 도시를 갑갑해하지만, 점차 도시 안에서의 다양성을 찾으며 적응해가고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며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키워나간다.
첫 화부터 마음에 들었던 점은 주인공 힐다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부딪쳐 해결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힐다> 속 사건을 일으키는 종족들은 저마다 그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고, 힐다의 중재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면 깔끔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힐다와 친구가 된다. 다시 말해 <힐다>의 세계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나쁜 악당이 없다. 또한 엄마를 비롯한 학교 주임 선생님, 참새 스카우트 지도 선생님, 기상관측사 빅토리아 반게일, 영리한 친구 프리다 등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역할들은 모두 여성이며, 그들은 약한 존재가 아닌 이성적이고 똑똑하며 강인한 인간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 인종 간의 다양성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매력은 영국인 일러스트레이터 루크 피어슨의 그림체다. 색감이나 라인이 무척 심플한데, 무엇보다 힐다의 반려동물인 사슴여우 ‘트위그’, 엘프 ‘알푸르’, 나무인간, 트롤, 말하는 새 ‘썬더버드’, ‘비트라’, ‘톤투’ 등 굉장히 귀여운 판타지적 캐릭터들이 매회 등장해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이처럼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즐겁게 접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라면 페미니즘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더 나아가 유아동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페미니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마지막 화에서 힐다의 엄마는 자신의 딸이 참새 스카우트 뱃지 수여식에서 뱃지를 하나도 받지 못해 실망하자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딸이 누구보다 착하고 용감하고 욕심 없는 아이라는 거, 엄마는 아주 잘 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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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세이 (민우회 회원)
2018년 상반기부터 본다큐 활동에 참여했다. 아동 청소년을 위한 페미니즘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있어 언젠가는 만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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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미니즘 콘텐츠 어디까지 봤어요?>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연애각본으로 포장하거나 여성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관념을 재생산하고,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는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에 질린 페미니스트 시청자들이 기존의 방송이 아닌 새로운 매체를 통해 페미니즘 콘텐츠를 발굴하는 기획연재입니다. 민우회 다큐소모임 <본다큐>의 회원들이 각 1회씩 맡아 올해 총 3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1편 보러가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좋은 여자들, <Good Girls> - http://reurl.kr/40011C47EO
2편 보러가기: 탐험을 떠나는 여성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 http://reurl.kr/4051258A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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