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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2월호[민우돋보기I] 민우회, 여성계의 거목 ‘감격시대’의 도가니로 빠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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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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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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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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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147
민우돋보기
민우회, 여성계의 거목
ꡐ감격시대ꡑ의 도가니로 빠져들다.
민우회 초대회장, 반가운 얼굴 이효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사진제공․미즈엔
지난 11월15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오전.
한국여성학회 참석차 서울에 오신 민우회 초대회장, 이효재 선생님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반세기, 한국 여성계의 산증인이시고 여성계의 대모이신 이효재 선생님이 계시고 선생님을 존경해마지 않는 후배들과 제자들이 있고 또 민우회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옥경 진해에서 오셔서 피곤하실텐데 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팔순을 맞아 선생님의 훌륭한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함께가는 여성」의 임무라 생각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선생님을 또 한번 괴롭혀 드릴텐데요. 너무 야단치지 마시구요.(일동 웃음)
선생님께서 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셨으니까 우선 민우회 활동을 하시면서 즐거웠던 일이나 혹은 안타까웠던 일을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이효재 돌이켜보면 60, 70년대 여성단체, 사회운동단체는 몇몇 선각자,지도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회원들은 지도자를 떠받들고 모시고 따라가는 성격이었어. 그런 단체들을 보면서 회원 중심의,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느꼈지.
그런데 마침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재정을 마련하고, 회원을 조직화하면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민우회였던거야.
나는 민우회가 회원중심의 단체가 되려 하는 것을 보고 희망이 보이고 제대로 민주적인 여성단체가 되겠다 싶었어. 그래서, 민우회라는 이름도 짓게 됐지.
(민우회라는 이름을 지을 당시, 신한당 당수가 이민우의원이었단다. 그 때 신한당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당이었기 때문에 일부는 민우회라는 이름을 반대했었다고)
이옥경 선생님께서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사회와 민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과거에 여성이 사회문제에 관심가지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을텐데요. 부모님의 영향인가요?
이효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식민지 시대를 살았고, 미국에 유학간 후에 한국전쟁을 맞았잖아.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분단의 비극을 겪게 되니까 한반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큰 틀에서 보게 되더라고…
아무 준비 없이 유학을 가고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2차 대전의 승전국이라 모든 것이 싱싱하고 당당하더란 말이지. 우리들은 식민지시대부터 그저 일본사람들한테 민족적 모욕을 당하면서 억압당하고 쫓기고 수모당하던 한에 젖어있을 때인데 말이야. 젊은 미국인들을 만나면 모두가 ꡒ원더풀ꡓ, ꡒ원더풀ꡓ하더라고…
(47년 말,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셨단다. 그래서, 48년 1월 1일에 미국에 도착하셨다고… 반세기전의 생생한 역사다)
나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데다 열등한 민족이라는 생각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어.
그렇지만 미국, 그리고 미국여성을 보면서 그래도 민주주의를 하면 희망이 있다는 그저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 활기있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서비스하는 미국여성들을 보니까 ꡐ민주주의란 이런 것인가?ꡑ 하는 생각이 들었지.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를 하면 우리가 자율성을 얻음으로 해서 언젠가는 민족의 독립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전쟁폐허에서 아직 복구도 안 된 혼란상태에 있던 서울에 서둘러 오게 된거야. 그게 아마 1957년이지? 당시 주위 사람들과 유학생들은 모두 만류했어. 그렇게 혼란스러운데 왜 들어가느냐구… 남들은 미국에 못 와서 난리라는 거야. 그래도 난 그 때 빨리 오고 싶었어. 빨리 우리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거지.
이옥경 이 대목에서 선생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선생님께서 ꡒ약혼하신 적이 있는데, 파혼 후에 미국에 갔다ꡓ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이효재 아버지가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일본경찰에 쫓겨 만주에 계셨어. 그 때, 김구 선생의 망명 온 집안사람과 이모가 친구사이여서 소개해 몇 번 만났어. 집에서 혼인시키려는 것을 보고 질겁하고 도망갔지. 왜 그랬냐 하면 내 성격이 뭔가 한가지에 잘 빠져드는 편이야. 그러니까 만일 결혼을 했다면 책임감 때문에 자식도 키우고 주부노릇을 잘 했을거 같애. 그렇지만, 결혼하는 것이 마치 푸주간에 들어가는 기분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바로 마산으로 내려와 버렸지.
이옥경 그 당시엔 정말 결혼이 큰 족쇄 였을거에요.(웃음) 그럼 다시 돌아와서요. 선생님께서 민족과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가진 후 전환점이 되었던 순간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효재 미국에서 와 보니까 이대에 사회학과가 없었어. 그래서 나보다 1년 일찍 와서 교양사회학을 가르치던 고황경 선생과 사회학과를 시작하게 됐지.
이대에서 사회조사방법론을 가르치고 ꡐ여성교육ꡑ이라해서 미국사회학을 가르쳤어. 그런데, 가르쳐 봤자 아이들은 빨리 졸업해서 시집갈 생각 밖에 안했지. 70년대는 시대적 상황이 불안했고 너무너무 보수주의적이서 그랬을꺼야. 월북한 그리고 납북된 가족 때문에 말은 못하고 입다물고 사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이화대학에 딸을 보내 시집만 잘 보내면 그만이었던거야.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 민주화되고 가족이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잘 안되더라고…
국내에서 가르치는 게 재미가 없다보니 답답함을 느껴서 ꡐ사회학 아시아 연구소ꡑ가 있는 버클리에 다시 갔지.
그 때 마침 사회학과 대학원생으로 있었던 이스라엘 학생을 만난거야. 그 학생이 이스라엘 얘길 하는데 ꡒ귀가 번쩍 뜨여!ꡓ 연구해볼만한 것이 너무 많은거야. 그래서 ꡐ키부츠ꡑ에 가게 됐지.
가보니 이스라엘은 나라 없이 이천년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인지 완전히 인종유엔이야. 그런데 이곳의 사회개발은 도시중심의 사회개발방식이 아니었어. 농촌을 중심으로 새털라이트(위성도시), 빌리지로 이름을 지어 공동체를 만들고 도시와 새털라이트가 서로 연결되도록 했어. 말 그대로 협동촌이지. 농촌센터는 사회주의 운동하는 젊은 신세대들이 후진국, 즉 동구라파, 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을 정착시켜서 협동적인 경제조직을 만들었고 글 모르는 여자들과 군인들의 집에 찾아가 하루에 두 시간씩 글을 가르쳤지. 과학적인 새로운 양육방법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도시여성단체들이 나와서 알려줬고…
ꡒ내가 가서 이런 모든 것을 목격했을 때 그야말로 흥분하고 감격해서 어쩔 줄 몰랐지.ꡓ
3개월 동안 키부츠에서 지내면서 모샤브는 모샤브대로 시도피는 시도피대로 각각 정착프로그램, 문화프로그램, 교육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본거야.
ꡒ그곳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지.ꡓ
김상희 당시로선 정말 놀라운 발상이었네요. 선생님께서 이스라엘까지 찾아가신 것도 그렇구요.
이효재 한국에서 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하면서 ꡒ여성은 지역사회의 주인이다ꡓ라는 화두로 고민하고 있는데, 70년대의 사회 근대화론이라는 단순한 논리로는 설명이 안 돼 더라구. 그런데 그 때 제3세계 운동이, 미국의 흑인운동이 일어났어. 흑인운동과 제3세계 이론이 나오면서 ꡒ백인사회학은 죽었다ꡓ고까지 했거든.
ꡒ아, 그러다 보니 호기심 많은 내가 또, 그것이 눈이 번쩍 뜨여.ꡓ
그래서, 미국에서 흑인대학으로 제일 오래된 대학인 피스크 대학에 갔어.
나로서는 흑인대학에서 흑인운동이 가장 래디컬할 때 사회학을 가르치고 리서치에 참여하고 싶은 욕심이었지. 리서치엔 참여하려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
윤정숙 선생님께서 분단문제를 제기하신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효재 75년 멕시코 UN대회에 갔어. 거기서 분단에서 오는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어.
민족문제, 분단구조란 것이 가부장제를 악용해 여성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면서 평등한 가족법개정 조차 안 해주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지. 우리 여성들이 가부장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분단구조를 해결하지 않고 되느냐?는 물음이 생긴거야. 그러다 보니 ꡒ내 머리 속에는 분단사회학 그것 밖에 없었어!ꡓ
김상희 과거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여성운동이 정말 활발한데요. 보시기에 어떠세요.
이효재 조금씩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는 성차별적인, 정치적인 어느 하나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어. 앞으로 여성들은 남북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것 같아. 예를 들어 남북간에 경제적이나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이옥경 마지막으로 민우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이효재 80년대 초반, 일본여성들은 생협을 기반으로 정치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비스분야까지 조직했었어. 이것을 보고 나는 소비자 중심의 생협운동 뿐만 아니라 생산자 중심의 협동조합운동을 생각했었어. 설사 소자본창업을 한다 해도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여성이 자본을 마련하기는 힘들잖아. 그래서 과거엔 생산자협동조합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여성창업을 위한 기금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여성 혼자 창업하기보다는 협동조합식으로 창업이 가능하겠다 싶어.
그래서 민우회가 창업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드는 준비모임을 하고 이론적인 작업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
여성취업은 시간제, 파트타임제 등의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고 기업체에 취업해봤자 대다수는 차별당하고 구조조정에 밀려나는 것이 뻔하잖아. 또 우리의 노동임금이 비싸져서 중소기업들이 전부 해외로 빠져나가고 일부는 개성공단으로 북쪽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는 추세지.
결과적으로 가부장적인 기업문화에 의해 남한은 자본주, 북쪽은 노동자로 결국 계급적인 관계가 형성될꺼야.
여성 두 세 사람이 공동투자, 공동경영, 공동노동하는 식으로 평등하게 사회참여를 한다면 그리고 여성이 주인이 되는 여성주의 기업문화를 만든다면 장애인,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고 개성공단으로 진출하게 되더라도 북쪽 여성들을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이야. 여성들이 제조업 뿐 아니라 문화, 서비스 분야를 협동조합 형태, 공동기업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민우회 지역조직 활동이 이런 방향으로 나간다면 젊은 여성들에게도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여성들이 해야 할 풀뿌리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여성기업이 북으로 진출하는 것 까지도 생각해야 될 것 같아.
1시간 넘게 이효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선생님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해에 내려가 자연과 함께하니 몸과 마음과 영을 하나로 하는 법을 익혔다고,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면서 건강이 좋아졌다는 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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