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하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2_활동가가 말한다, 민우회의 과거-현재-미래
■기획2
활동가가 말한다, 민우회의 과거-현재-미래
2017년 9월 12일, 30주년 기념식을 통해 민우회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30년을 내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기념식 2시간의 시간 속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다. 10월 18일 활동 기간도 경력도 다른 4명의 전․현직 활동가들이 모여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글에 그 날의 이야기를 정리해 담았다. 참가자: 나우, 눈사람, 생기, 쎄러 / 사회․정리: 윤소 |
나우(최진협) 2004년 여성노동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14년차 활동가입니다. 사무처장을 맡고 있습니다. 눈사람(최원진) 2012년 민우회 활동가가 되었고, 성평등복지·회원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생기(유경희) 1992년 동북여성민우회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2009년 대표로 민우회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쎄러(서지영) 2015년 물길에 참여한 인연으로 민우회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현재 성평등복지·회원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윤소: 30주년 기념식 어떠셨나요?
생기: ‘역시 민우회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전 대표들과 만났는데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나우: 기념식 때 왔던 전 활동가들이 민우회 행사에 오면 기운 나는 주사를 맞은 것 같다는 말을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30주년을 준비하면서 한 활동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운동을 우리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활동하면서 특히 가족에게 인정받기가 어렵잖아요. 15년이나 일했는데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내가 어디서 일하는지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의 운동, 민우회의 운동을 보시고, 자랑스럽다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다른 활동가들의 가족도 그랬던 것 같고… 오셨던 가족들 중에 민우회에 가입하시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자부심을 느꼈어요.
생기: 그런 자리가 아니면 만날 일이 없는 옛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어요. 예전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그때 내가 이런 활동을 했었지' 떠올리며 민우회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도 하고…
윤소: 기념식에서 <민우회 30년, 운동이 남긴 것들> 프로그램을 보시면서 많은 민우회에서 만났던 얼굴과 순간들이 떠오르셨을 것 같아요. 기억나는 사람, 소모임, 투쟁 등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생기: 민우회는 한부모 운동은 1997년부터 했는데, 그때는 한부모라는 이름은 없었고, 편부모라고 했었어요. 한부모라는 이름은 민우회가 만들었어요. 한부모 교실, 한부모 힘내기 한마당 등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활동을 함께 한 소모임 두 개가 있었어요.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줄여서 '행만사', 9월 달에 모인 '구월애'(영화 '시월애'가 나온 즈음이라 지어진 이름), 이렇게 두 개의 소모임이었어요. '행만사'는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어요. '셀프헬프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며 가족보다 더 나은 가족이 됐죠. 한 달에 한 번 한부모 교실을 열었는데, 왔다 가면 한 달은 약발이 간다고 했었죠. 나가면 시달리는데 지지받고, 공감해주는 경험이 정말 소중했던 거죠. 저는 그분들과 아직도 연결이 되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도 그 때 민우회 활동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이야기를 아직도 하시곤 해요.
나우: 저는 KTX 투쟁이 기억에 남아요. KTX가 처음 생길 때였잖아요.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면서 홍보도 많이 했고, 정말 스튜어디스 하시던 분들이 KTX 승무원이 되기도 하셨어요. 처음 상담을 오셨을 때 정말 스튜어디스 스타일로 오셨었어요. 말투도 성우 같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이분들을 만나면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단식도 하고, 목소리도 갈라지고, 삭발도 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제가 민우회 활동하면서 기자회견문과 성명서, 의견서를 가장 많이 쓴 것이 이 투쟁이기도 해요.
그리고 제가 여성노동상담을 오래했었는데, 아주 많이 연락을 했던 내담자가 있었어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으로 상담을 받으셨어요. 그 지역에는 일할 곳이 그 공장뿐이었고, 그곳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죠. 오랫동안 여러 가지 해결책을 고민해왔는데, 결국 어느 날 그분이 "지금까지 함께 해줘서 고맙다.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순응해야만 내가 이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씀을 하시고 연락을 끊었어요. 그 일이 기억이 많이 나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옥상에 가서 많이 울었어요. 그 뒤부터는 여성 노동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로 상담을 이어왔던 것 같아요.
생기: 그 사람이 더 싸워주길 바랬던 거예요? 한계 때문에 속이 상했던 거예요?
나우: 저도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노조도 손을 뗐고... 그때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개인이 혼자서 싸울 문제는 아니다, 세상을 뒤집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눈사람: 저는 작년에 물길 사업을 담당했어요. 참가자 중에는 페미니즘 붐 이후에 페미니즘 세미나도 만들고, 이제 막 페미니스트로서 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들에겐 즐거움과 두려움이 공존했어요. 페미니즘이 옳고 좋은데, 백래쉬가 심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메갈x'로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함께 학교에서 포스트잇을 붙이는 활동을 하기로 했는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 활동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붙이고 있을 때 누가 나를 볼까봐 두려운 마음도 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을 하고 발표까지 했어요. 발표에서 "행동을 해야겠다. 두려웠지만 행동을 하니 두려움이 없어지고, 행동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활동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 활동을 통해 변화하는 자신에 대해서 참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어요.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2015년에 했던 노년상상파티에요.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30대 여성이 그 자리에 정말 많이 왔었어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 정말 좋았어요. 노년이 막막하게 느껴졌는데 이 자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내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그리고 엄마 이외에는 50대 여성을 만날 일이 없는데, 이런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고 서로 연결되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이 활동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많이 느꼈었어요.
쎄러: 저는 작년 ‘검은 시위’가 많이 생각이 나요. 해외에서 ‘검은 시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팀 활동가와 한국에서도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말이 씨가 됐는지 정말로 검은 시위를 하게 된 거예요. 너무 놀랐었어요. 낙태죄 폐지 활동은 계속 해왔지만, 이번처럼 거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낙태죄 폐지를 외친 것은 처음이었잖아요. 심지어는 해외에 있던 회원에게 연락이 와서 아일랜드의 ‘검은 시위’에 연대를 해달라고 요청을 받기도 했고요. 해외의 여성들과 연대를 하고 거리에 나가서 응원의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은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어요. 그때 국제연대가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굉장히 큰 힘이 되었고, 회원의 힘을 느끼기도 했고요.
저는 거리에서 했던 것들이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이 신촌에서 했던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요. 갑자기 준비된 자리였잖아요. 사전에 발언 신청을 받기는 했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발언을 신청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청을 하고 있고… 행동을 할 것이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여성들의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었고, 오래오래 생각이 날 것 같아요.
눈사람: 지금까지 보아왔던 말하기 대회에서는 보통 가면을 쓰고, 사진도 못 찍게 하고, 가명을 쓰기도 해요. 그것이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된 자리였어요. 성폭력 말하기 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는데 길거리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말한다는 것이 놀라웠죠. 앰프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고, 신촌 가게들에 부탁해서 충전도 하고 엄청 고생도 했는데, 그만큼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운소: 이렇게 좋았던 기억들도 있지만, 거센 항의에 힘들고 화가 났던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각자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눈사람: 군가산점제 폐지 때는 한달동안 홈페이지도 닫았었다면서요?
생기: 닫았죠. 닫을 수밖에 없었죠.
나우: 군가산점제 폐지 이후로 홈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안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웃음)
생기: 호락호락 사업 때도 엄청나게 전화가 왔었어요. 호락호락은 '부르면 부를수록 즐거운 호칭'이라는 뜻이에요. 처가와 시가의 호칭이 비대칭적인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불러서 친근하고 편한 호칭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올케가 오라버니의 계집이라는 뜻이고, 며느라기에는 빌붙여 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문제제기를 했는데, 비난을 받았던 거죠. “너희 국어학적으로 제대로 알고 있는거 맞냐”면서 따지고…
나우: 정말 많이 받았죠. 그때는 온통 욕이었어요. 제가 전화를 받고 당황하면, 다른 활동가가 받아서 같이 욕하고 끊어주고… 황우석 사태 때도 전화가 많이 왔는데, 그때는 공포로 다가왔어요. 집단적으로, 국가적으로 황우석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던 때였고… 심지어 잠입 취재도 왔었잖아.
생기: 이 이슈에서는 대중적인 공격보다는 '황빠'들의 공격이 장난이 아니었죠. 저는 그 당시 생명윤리와 관련된 각종 공청회가 있으면 참석해서 발언을 하는 일이 많았어요. 발언을 하고 나오면 '황빠'들이 저를 확 둘러싸고 "왜 황우석 박사를 음해하냐"고 목소리 높여 따지고 그랬어요. 심장이 쿵 내려앉고 아득해지고, 정말 무서웠죠. 그래서 키가 큰 활동가들이 "왜 이러냐"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나가는 일도 있었어요.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잊을 수가 없어요.
나우: 내가 당황할 때, 나를 대신해서 싸워주는 활동가들이 있죠. 그럴 때 정말 든든하죠. 그리고 ‘낙태’ 관련해서도 난리도 아니었어요. 프로라이프에서 찾아오고…
생기: 아 낙태죄! 낙태반대운동연합 대표랑 시시때때로 부딪쳤죠. 생명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는 사람으로 몰아가면서 엄청나게 공격을 받았었죠. 종교계 쪽에서 전화해서 "너희 대표 종교 있어? 없어?" 따지고 힘든 과정이 있었죠.
눈사람: 최근에 항의전화가 많이 왔던 건 ‘더러운잠’* 때문이었죠. 명절을 앞둔 때였는데, 우리가 웬만하면 항의전화를 다 받는데, 그날은 전화선을 뽑아버렸어요.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가면서 받고, 여러 명이 동시에 전화를 받고 있기도 하고, 오전이 지나고 나서는, 활동가 멘탈 보호 차원에서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었죠.
*민우회는 지난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여성성을 부각한 ‘더러운잠’이라는 그림이 국회에 전시된 것에 문제제기
나우: 박사모도 전화하고, 그 반대쪽도 전화를 하고, 활동가들한테 맨스플레인하고…
눈사람: 저는 최근에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이 활동을 보고 전화하신 분과 통화를 했어요. 자기는 성차별은 반대하고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교실에서 동성애를 가르치면 되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동성애를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거라고 설명을 했어요. 설명을 해도 듣지도 않고 격앙되다가 저한테 갑자기 동성애자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5초 정도 말이 없다가 자기 말이 상처가 됐다면 미안한데 자기는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나니까 위경련이 오더라고요.
나우: 예전에는 찾아오거나 전화로 항의하는 일이 많았다면, 요즘은 온라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죠. 2-3년 전부터 민우회도 SNS 활동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매일 지켜보다 보니 활동가들의 멘탈이 흔들리는 일도 많아졌어요. 사실이 아닌 말들이 사실처럼 퍼지는 일도 있고 하잖아요. 그래서 내부 논의를 하면서 활동가들이 소진되지 않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많이 이야기했어요.
눈사람: 어떤 이슈가 터지면 "민우회 뭐하냐" "민우회 아직도 아무것도 안하네" "아무것도 안할거냐"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정말 같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시민사회 단체가 24시간 대기조는 아니잖아요. 한편으로 민우회라는 조직에서 활동가들을 보호하는 방식이 좋은 것 같아요. 전화항의가 많다보니 최근에 이런 원칙을 정했어요. 욕을 하면 전화를 끊어도 된다는. 개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조직문화로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것 같다요.
윤소: 30주년을 준비하면서 예전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창립 초기에 민우회는 주부운동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소식지에 회원의 남편 기고글도 실리고, 남편상(?)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가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회원층이 변화하고 있는 것인데요, 각자 활동하던 시기의 회원층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생기: 초창기에는 주부들이 주회원층이었어요. 생협운동이 컸었고, 저도 생협 물건 배달도 하면서 생협회원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었어요.
윤소: 그런데 왜였을까요? 87년에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우회가 만들어졌으니 운동권이 많았을 것 같은데…
생기: 그랬기 때문에 더욱 주부운동을 한 거예요. 여성들의 일상의 변화가 있어야 굳건한 변화의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회원층으로 사무직 노동자가 있었고, 노동 이슈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뤘어요. 주부운동에만 주력한 건 아니었고, 주부와 사무직노동자에서 20대로, 그리고 요즘에는 10대까지 회원층이 넓어지고 있는 거죠.
나우: 고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창기의 회원층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조직과 회원 모두 나이가 들어가고, 회원이 확대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30년 된 조직임에도 회원이 계속 2,000명 수준이었던 거잖아요. 2010년 정도까지도 이런 현상이 지속되었고요.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새로운 회원이 늘어가고 있는 거죠.
생기: 대학생,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하고, 물길과 같은 사업을 하게 된 배경이기도 해요.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없어지고, 여성학과가 없어지는 흐름 속에서 여성위원회가 다 사라졌단 말이죠. 그런 흐름 속에서 대학생들이 여성운동으로 들어오지 않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여학생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면 여성운동단체와 함께 활동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연결이 다 사라졌죠.
나우: 물길 활동을 보면서, 민우회의 체질개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 되는지 몰랐고, 어떻게 소통해야 되는지 몰랐어요. 3-40대만 늘 만나던 상황에서, 기존회원만 만나고, 하던 운동만 계속하다보니 일정 정도 정체기가 있었던 거죠. 그런 상황의 돌파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에서,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기까지 오랜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까지는 결과를 예상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거죠.
눈사람: 물길 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몇 년 후 회원가입을 하시는 경우도 많았고,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기도 하였고, 이런 것은 우리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나우: 민우회 회원층의 세대 이동을 고민을 하면서, 실제로 이동을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또 너무 20대 집중인거에요. 그래서 4-50대,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야기를 하죠. 회원층이 폭 넓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눈사람: 민우회를 통해 10대 여성과 70대 여성이 만날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생기: 다양한 결을 가진 주체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활동을 하고, 민우회의 앞길에 다양함을 담아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윤소: 30년의 시간 속에서 민우회도 조직의 문화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호칭이나 서로 지켜야 할 규칙이나 다양한 것들이 변해왔겠죠?
생기: 90년대부터 "대표님" 이렇게 부르지 말고, 나이, 직급 관계없이 별칭을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어서 별칭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상담을 받던 내담자나 한부모사업에 참여했던 분들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이렇게 활동가들과 회원들이 서서히 별칭을 쓰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에요. 민우회 밖에서는 별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죠.
쎄러: 그래서 신입회원 만남의날을 진행할 때 정말 길게 조직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요. 별칭을 사용하는 의미도 설명하고, 이성애자임을 단정 짓고 질문하지 말자고 제안하고, 평등이력서를 쓰는 의미도 설명하고, 더치페이 문화, 자기 컵 씻기 등 굉장히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설명을 해요. 지루할 수 있는데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문화인 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잖아요, 익숙하지 않은 이런 문화 때문에… 하지만 민우회를 통해 사회의 불편한 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긴 하는 것 같아요.
나우: 그리고 퀴어, 10년 전에만 해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지 않았죠.
윤소: 저는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회원들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자주 하고, 당연히 서로를 이성애자라고 여겼던 거죠. 그러다가 한 회원이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고 해요.
눈사람: 저는 민우회를 처음 인식했던 것이 차별금지법 제정 덕분이었어요. 그 활동을 보고 페미니즘이 이런 영역에도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런 활동 덕분에 민우회 활동가와 회원들의 정체성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조직의 문화와 성향이 자연스럽게 변화했어요.
윤소: 지금까지의 30년만큼 앞으로의 시간 또한 중요하겠지요. 30주년 기념식에서 비전을 발표하긴 하였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민우회의 비전이 있으실 것 같아요.
쎄러: 올해 열길 사업을 하면서 10대와 함께 하는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잖아요. 10대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고민이 많았거든요. 나이주의에 대한 고민도 있고, 뒤풀이도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러 가는데, 이런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고민되고요. 그래서 저 스스로도 체질개선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민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우: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을 받아서 움질일 수 있는 유연한 문화와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해요. 고정된 이슈만을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흐름을 어떻게 읽어내고, 내부적으로 어떻게 소통할지를 고민해야 하겠죠. 많은 단체들이 기존의 운동을 반복하고,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민우회는 다양한 층위의 활동가들이 활동을 하고, 그들이 발화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고민을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문화를 유지하도록 일상적인 노력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최근 민우회 10년 평가를 하면서 제가 조직문화 평가를 했는데, 민우회는 정말 오랫동안 조직문화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똑같은 논의 주제 때문에 지치기도 해요. 그런데 똑같은 논의를 일상적으로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죠. 또 일상적이기에 놓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꼼꼼히 챙기면서 끊임없이 성찰하면 좋겠어요. 그게 우리의 비전이면 좋겠고, 그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눈사람: 나우가 말한 것처럼 구성원의 발언을 막기보다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봐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여성차별이 존재하잖아요. 이것에 대항해서 싸우긴 하지만, 우리의 지향은 여성성을 고정하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여기 시즌2 결과를 통해서 직접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구분자체를 차별로 인식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나우: 저는 민우회 활동이 점점 재밌어졌어요. 민우회의 활동가들이 재미있고 흥미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해야 하니까 당위적으로 하는 일, 행정절차에 가로막히는 일이 많았다면,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생기: 남들이 하지 않는 이슈를 발굴하는 것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상큼하고 신선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이슈를 크든 작든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본인이 행복하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프지 말고. 서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들어줄 수 있게 되길 바라요. 되도 않는 이야기이더라도 민우회는 들어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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