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상반기*함께가는여성] 기획_한국 언론, ‘미투’를 들을 준비가 됐습니까?
기획
한국 언론, ‘미투’를 들을 준비가 됐습니까?
최지은 | 한국 대중문화와 여성혐오에 대한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썼다.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화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다.
12만 5천 156개. 2018년 1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뉴스 란에서 ‘미투’로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의 숫자다. 검찰 조직 내 성폭력 피해자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라고 말한 날부터 오늘까지, #Metoo, 피해자들의 ‘나도 말한다’는 목소리들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성폭력에 대해, 단일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강간 문화에 대해 이토록 폭발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공론장에 쏟아져 나온 적은 없을 것이다. 2016년 10월, SNS에서 문화계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던 당시에 비해서도 언론의 관심은 전에 없이 뜨거웠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언론
4월 25일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언론 속의 미투’ 합동 토론회1)에서는 “사실 확인을 앞세워 피해자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것을 요구하거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에 근거해 질문을 던지는 경우”, “‘미투’에 나선 피해자 개인을 조명하는 보도” 등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공개 인터뷰를 결정하기 전, 보도 이후 겪을 수 있는 여러 피해에 대해 언론사 측으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고지 받았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은 특히 중요하다. 모든 것이 온라인에 저장되는 시대에 신상을 공개한 여성에게 가해질 집요한 공격, 초반의 실명 보도 경쟁 이후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여성에게 “당당하면 얼굴 까고 나오라”며 조롱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 흐름에 대해 언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변질된 미투’라는 함정
물론 신상을 드러내더라도 누구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피해자’ 감별을 즐기며 진영논리에 매몰된 이들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를 광적으로 비난했고, 가십성 보도 또한 쏟아졌다. ‘공작’이라는 프레임이 등장하기 무섭게 정봉주 전 국회의원의 과거 성추행 폭로가 나오자 언론들이 이를 ‘진실게임’으로 다룬 결과, 그의 ‘봄날’같은 정치 인생이 몰락했다는 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은 “이건 미투가 아니다”였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피해자를 향해 “미투가 변질되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한국형 페미니즘은 가짜/왜곡된/비뚤어진 페미니즘”과 마찬가지의 억지였지만, ‘네티즌 의견’을 핑계삼아 혐오 발언을 받아적은 언론들은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고 가해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젠더 빼고 성폭력 말하기?
‘성폭력’이라는 정확한 단어 대신 ‘미투’를 집어넣은, “○○○, 미투 가해자로 지목”같은 보도 역시 사안의 심각성을 희석시켰다. ‘성폭력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며 일견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 기사들은 한국 사회 어느 곳에서나 강고하게 작동하는 젠더 권력에 대해 슬쩍 외면했다. 물론 남성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여성들이 일상 공간에서 경험하거나 경계하며 살아가는 강간 문화의 주된 가해자가 남성이라는 (그리고 남성 대상 성폭력의 가해자 역시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디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남혐·여혐 갈등으로 번지는 미투?”라는 제목의 기사는 “허위 미투 고발 등으로 여혐·남혐 대립각이 세워지고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면 안 되겠죠?”라는 훈계로 끝맺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이토록 공허하면서도 유해한 언어를 세상에 퍼뜨리는 데 네 명의 기자가 필요했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미투’ 이후의 전진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직후, 강남역 추모 행진을 기획한 여성들은 현장에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성평등 관련 시정권고 심의기준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여성이 피해자인 강력 사건이나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 남성의 성별과 존재를 지우고 ‘○○녀’따위 호칭과 함께 피해자를 부각시켜온 언론의 보도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2년이 지났다. 폭풍 같았던 지난 3개월을 통과하며 한국 사회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는 중이다. 미투 관련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파악한 여성가족부에서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을 개정해 언론사에 배포할 계획이다. 언론의 선의나 자정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언론만이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는 날이, 머지않아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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