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_기후위기, 모두에게 같지 않지만 결국 모두에게 다르지 않을
[2020 하반기-함께가는 여성] 기획
기후위기, 모두에게 같지 않지만 결국 모두에게 다르지 않을
이름이 뭐예요?
영국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이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표현을 ‘기후위기(climate crisis)’, ‘기후붕괴(climate breakdown)’, ‘기후비상사태(climate emergency)’ 등의 용어로 대체하여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 작년 5월이다. 자연의 속도보다 25배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기후1를 가리켜 그저 ‘변화한다’고 일컫는다면 독자들에게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할 언론의 의무를 저버리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 나아가 ‘기후변화’라는 용어에는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위기’의 본질과 심각성을 희석 내지는 부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지구온난화에서 기후변화로, 또다시 기후위기로. 우리는 그저 심심해서 이름을 바꿔 가며 부르는 게 아니다.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만 현상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처한 기후 ‘위기’를 방증한다.
녹색연합이 실시한 ‘기후위기와 석탄발전에 관한 시민인식’ 설문 조사. 응답자 다수가 올여름 폭우와 코로나19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느끼게 됐다고 답했다.
잦아지는 재난, 선명해지는 위기
얼마 전 녹색연합이 실시한 여론조사2에서 드러났듯이, 절대다수의 시민은 이미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3 기후위기가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낀다.4 작년 9월에 시작되어 6개월 넘게 지속하며 34명의 사람5과 10억 마리 넘는 동물의 생명을 앗아간 호주 산불, 북극에서도 가장 추운 (또는 추워야 하는) 지역이지만 6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치솟으며 관측 이래 최고 온도를 기록한 시베리아, 54일 동안 퍼붓는 비로 최장 장마 기록6을 경신하며 전국에 산사태와 침수 피해 등을 낳은 올여름 한반도 폭우 사태 등….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기후 재난을 목격하고 직접 겪는 동안, 위기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90-2015 누적 탄소 배출량 비율 및 전 세계 소득집단 소비와 관련된 1.5도 세계 탄소 예산
누구의 책임인가
하지만 우리 모두 앞에 닥친 이 위기는 사실, 모두에게 같지 않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위기를 만들어 낸 이들은 소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옥스팜이 스톡홀름 환경연구소와 함께 발표한 보고서는 1990년부터 2015년까지의 탄소 배출량 중 절반 이상에 대한 책임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의 사람들에 있다고 분석했다. 최상위 부유층 1%로 범위를 좁혀도 그 책임은 여전히 15%나 된다. 이에 비해 돈이 없는 하위 50%의 사람들이 누적 탄소 배출량에 갖는 책임은 고작 7%에 불과하다.7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6천 3백만 명(최상위 1%)이 내뿜은 탄소 배출량이 가장 돈 없는 31억 명의 사람들(하위 50%)이 배출한 양보다 두 배도 넘는다는 것이다.
소득의 불평등, 위기의 불평등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각 소득 집단별로 탄소 배출량을 ‘얼만큼씩 늘려 왔는가’ 하는 점이다. 빈곤층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탄소 배출량 증가가 불가피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같은 기간 동안 빈곤층 50%의 탄소 배출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총 배출량 증가의 6%만 차지했다) 반면 최상위 5%에 속하는 부유층의 총 소비 배출량은 전체 증가의 3분의 1 이상(37%)를 차지하여, 급격한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는 결국 극소수 부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지나치게 소비를 늘려온 탓임이 드러났다.
순서는 달라도 결국엔…
그리고 지금, 그 급격한 탄소 배출량 증가의 결과는 배출에 가장 책임이 적은 이들에게, 그리고 이미 사회 취약 계층에 놓여 있던 이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적용되고 있다. 냉방 시설이 갖춰진 일터가 없는 이들에게, 여름철 폭염으로 달궈진 도시에서 쾌적하고 안전하게 하루를 나는 일이란 거의 공상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도시 안에서도 실내 노동자보다 하루 200여 개의 배달 물량을 소화해야 하는 택배 노동자에게 기후위기는 더 가혹하다. 에어컨은커녕 창문도 없는 1평짜리 쪽방에서 지내는 이에게 열기가 식지 않는 여름밤은 더 잔인하다. 이상 기후로 유례없이 긴 장마가 이어질 때, 폐지를 주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가 걱정하는 건 내일 아침 꽉 막힐 출근길이 아니라 오늘 저녁밥 한 끼다. 따뜻한 겨울과 메마른 봄을 보낸 탓에 한 해 사과 농사를 망친 농부의 깊은 한숨은, 인터넷으로 상자에 고이 포장된 사과를 주문해 먹는 도시민에게까지 좀처럼 전해지지 않는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위기의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이들이 먼저 감지한 위기의 신호를, 고통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누가 초래했든, 누구에게 먼저 일어나든, 지구 위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기후위기는 결국 모두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1)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변하는 1만 년 동안의 지구 표면 평균 온도 변화폭은 섭씨 4도였으나, 산업화 이후 약 100년 동안의 변화폭은 1도에 가깝다. (약 0.87도)
2) 녹색연합이 한국갤럽에 의뢰하여 전국의 만 14세 이상 69세 이하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8월 20일부터 25일까지 실시한 ‘기후위기와 석탄발전에 관한 시민 인식’ 설문 조사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2.53%p이다.
3) 응답자의 97.7%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매우 심각하다 65.3%, 약간 심각하다 32.4%)
4) 응답자의 97.4%가 ‘기후위기가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매우 영향을 미친다 61.4%, 약간 영향을 미친다 36.0%)
5) 산불로 인한 직접 피해 사망자 수가 34명이며, 연기 흡입 등으로 인한 간접 피해 사망자 수는 445명에 달함.
6) 중부 지방 기준. 7) 2020, 옥스팜, 〈탄소 불평등에 직면하다 – 기후정의,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핵심〉, 3쪽
유새미
❚녹색연합 활동가
천천히 즐겁게,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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